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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Mar 27. 2017

대중음악과의 조우.

대중가요의 참 맛을 느껴보다.

대중가요를 소비하다.


나의 학창시절만 해도 주류의 음악은 단연 팝송 이였다.왠지 K-POP은 수준이 떨어지는 그리고  통상적인 산파타령에 신물을 느낄때가 있었다. 그러나 서구음악이 우리의 귀를 점령하고 있을때  우리 고유한 정서를 내포하면서 음악적 정체성을 이어나간 가수들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누굴까?, 단순히 음악사적 맥락은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늘 궁금했었다. 팝을 대신할 정도로 국내대중가요의 부상의 씨앗은 무엇 이였을까? 그건 생각컨데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편안한 음악의  한 축 과 극도로 정제된 시 적인 가사, 푸념 하듯이, 혹은 담담하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 과  감수성이 풍부한 뮤지션들의 노래라는 다른 축. 그러한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면서 읽어 본다면 나름 신선한 시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당대의 사람들의 정서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면에서  사람들과 높은 수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고 향유되는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주류의 음악 만이 아닌  소수 약자들의, 혹은 공공선을 지향하는 이들의 음악들. 그들의 노력들.그들이 아마도 한국 청년 문화를 언더그라운드로 말없이 지원했던 주인공들이다.


후술하겠지만 산울림이라는 밴드를 통해 산울림 이전의 가요들은 가슴저편의 위안을 노래한 것들이 많다면 산울림의 노래는 노래속에서 위안을 찾는것 과는 다른 ‘자기발견’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자기를 새롭게 찾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그런 능동적 삶의 지표를 청년들에게 제시하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 생각도 든다. 그들의 음악이 결국 여러 형태로 뻗어나갔지만 동물원이 적통을 이어 받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감출수 없다.  


더구나 한국대중음악으로 조금 더 들어가기 전 미국 팝 음악을 이해한다면 어쩌면 국내 대중가요을 더욱 잘 소화시킬수도 있기에 이 한장의 그림을 첨부해 본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국 팝음악의 연대별 정리


1970년대.


어처구니 없는 "전체주의적" 적 정책은 1970년대 중후반의 대중음악계를 공백으로 만들어 놓았다. 

1964년 키 보이스가 로큰롤(당시에는 일본식의 조어 ‘그룹사운드’로 불렀다.) 로 <그녀 입술은 달콤해> 를 발표를 시작으로 수많은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중현을 제외하고 대부분 번안가요를 가지고 국내가요계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중 <해변으로 가요> 가 일본 노래의 번안가요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없다. 신중현이 이끌던 더 맨과 히식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지향하는 음악을 추구했다. 아마도 <레드 제플린-지미 핸드릭스> 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미국 팝 음악의 역사는 사실 매우 심플하다. 


그룹 사운드 반대쪽에는 포크 진영의 사람들이 있었다. 1968년 송창식과 윤형주의 트윈폴리오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그러나 이들 역시 번안 곡들이 주류였다. 1970년대가 되면서 자신들의 노래를 담은 한대수와 김민기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 후에 많은 뮤지션이 탄생한다.  그러나 1970년대 대중음악은 록과 포크가 아니가 "대마초 파동" 과 "가요 정화 운동" 이였다. 이때 100여명이 넘는 가수들이 활동을 정지당하고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청년문화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서구 사회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갈수 있었던건 끊임없는 '자체갱신', '내부혁명' 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이다.그들의 예술을 통해 '청년 문화' 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고 그들의 저항정신과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시대는 흐르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록과 포그가 시작되기도 전에 "청년 문화" 의 명백한 후퇴가 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음악적 암흑시대가 아니라 시대의 암흑기라고 봐야 한다. 


심수봉 - 트로트의 힘.


묘한 느낌과 신비한 느낌의 소유자 그리고 대학가요와 성인가요의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 사람. - 이문세 의 말이다.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 에서 명지대  재학중이던 그녀가  "그때 그 사람" 을 불렀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포크나 록 두 장르가 주류였고 "트로트가 어떻게 대상이 될수 있는가?" 하는 분위기 였다. 수상과는 다르게 대중들 사이에서 심수봉의 노래는 순식간에 애창곡, 히트송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 해 바로 지구레코드와 200만원을 받고 음반체결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중요한건 그의 노래는 물밑으로 대중의 가슴을 파고든 것이다. 화려한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려진 뒷편에서 무게가 불어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밑과 뒷편은 바로 심수봉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녀의 노래는 외형적 히트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천만의 가요가 되곤 했다. 우리가 느끼는  그 묘함이 물밑과 뒤편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심수봉이라는 가수 에게 주는 특전이다.

 

1984년에 공개된 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삼천만 대중의 애창가로 선정이 되었다. 우리모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꺼내지 못하지만 사석의 자리에선 모두 다 끄떡이는 공감을 창출한다. 실감나게 와 닿으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언어들 그 경계선상의 아리아에 우리는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노래방에서 행여 누군가 심수봉 레퍼토리를 선택해 마이크를 잡으면 일제히 환호를 보내고 노래에 대한 그 사람의 안목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 자주 목격했던가.


하늘이 내려준 비음 바이브레이션 조금은 불규칙적인 호흡 가수로서의 각별한 재능은 절대적이다. 또하나 그녀의 특징은 트로트가수로서는 매우 드문 작사작곡 능력을 빼놓을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난 클래식도 좋지만 대중가요를 제대로 한번 이해해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백만송이 장미", "젊은 태양", "사랑밖에 난 몰라", "미워요", "무궁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모두 그가 작사작곡한 것들이다. 또한 그녀는 피아노 뿐만 아니라 드럼도 마스터해 드림감각을 익힌 것이다.  본인은 한사코 "난 전성기가 없었던 가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는 늘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히트곡이 수 없이 많지만 2002년 그녀가 뉴욕에 머물면서 드럼을 연마하고 연습한 "백만송이 장미" 라는 노래를 첨부하고 싶지만 친구들은 늘 나의 심수봉의 미워요를 부른것을 기억하곤 한다. 철없던 시절 심수봉은 우리 가슴의 애인이였다.그는 트로트를 넘어 당시에 대중음악계에 '작가' 란 칭호를 수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여성 음악이다. 

그러나저러나  아침부터 너무 우울한 노래만 들어서 그런지 마음이 편하질 않다. 

이럴때는 볼빨간 사춘기 노래를 하나 듣고 다시 글을써야 할듯 하다.


1980년대.


여전히 80년대의 대중음악계는 암울할 것 같았다. 놀라운 재능을 소유한 뮤지션들은 자취를 감추고 저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유신정권은 물러났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은 군부정권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그러한 어둠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언더그라운드. 1970년대 김민기와 조동진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방송을 기웃거리지 않고 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며 대중과 만났다. 그 중에서도 들국화의 등장은 또 다른 청년문화를 대표했고 라이브 문화를 정착시켰다. 70년대 선배들이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공연했다면 이들은 대중과 함께 호흡했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 가요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 나의 애창고 18번을 부른 가왕 '조용필' 난 그의 노래를 사랑한다. 


들국화 - 국화도 아니다 바로 들!국화 다.


역사적인 들국화의 데뷔엘범(1985) 표지를 장식하는 네 명의 젊은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이 선 이례로 명반 순위에서 늘 1위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산울림의 앨범과 유재하의 앨범은 두 세번째를 차지했지만 들국화의 입지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그저 음악이 좋아서 네 명의 청춘이 순수함으로 함께 만든 앨범이 그 토록  대중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차지할지 알고 있었을까? 1980년 최성원의 지휘아래 네 명의 색깔이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최성원의 포크적인 감성 , 전인권의 발가는 소리같은 폭발적인 음성 그리고 순수한 외침이 <그것만이 내 세상> 에 묻어 나온다. 


젊은날 그 노래 들으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노래밖에 부를수 없었던 그것뿐인 내 세상 이였음을.. 


동물원 1집의 맴버들

동물원-거리에서


이들은 동물원이라는 이름 이전에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 라는 팀명을 가질  뻔 했다. 동물원의 적극적인 지원자였던 산울림의 김창환이 제안한 이 이름은 이화여대생 들에게만 팔아도 천 장은 팔수 있을 것이라는 장난스러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 만큼 동물원의 시작은 농담같았으며 진지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자신의 노래는 그저 하나의 재미였으며 놀이 였으며 좋은 취미 였다.각각 고등학교 친구,대학동기 등이 모여 결성한 이 동물원의 구성원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노래들을 모아 한 장의 기념 앨범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동물원은 이렇게 철저하게 아마추어적 이였고 음악으로 생활을 영위 하겠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실제로 팀의 메인 보컬 이였던 김광석과 기타리스 이성우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맴버들은 음악활동과는 관계없는 직업을 가졌다. 그 후 이성우와 김광석은 1집과 2집을 끝으로 동물원을 나오게 된다. 


사실 내가 이 그룹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이들의 노래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주류가요의 문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포크도 아니고 발라드도 아닌 동물원의 노래였다. 김창기는 일상생활에서 얻어낸 비범한 노랫말과 덤덤한 보컬로 동물원의 음악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잊혀지는 것> 과 <변해가네>  노래들은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아무나 쓸수 없는 가사들을 만들어냈고 이후 그들은 소심한 남자들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해는 작사가라는 호칭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이 동물원 이라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이데올로기 철장속에 산다는 의미 로서의 그 이름자체가 그들은 이미 회색분자 였다. 듣고 있고 나도 회색분자였다. 

그 때에는 서태지의 빛에 가리워졌지만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과연 좋은 노래란 어떤 노래인가?” 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다른 가수들에 대한 정리는 너무 길어서 개인 블로그에 정리하였습니다. 김민기,정태춘,김현식,유재하,동물원,들국화,조용필 등...


http://tgkim.net/?p=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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