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친구일까?
잘 나가는 인생을 자랑하면서 비슷한 수준끼리 어울리는 사교의 대상인가?
아니면 어려울수록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힘을 북돋아주는 동반자인가?
사업에 실패해서 걷잡을 수 없는 난관에 빠졌을 때 편안하게 만나서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벗들은 과연 없는가?
고등학교 동창의 잘 나가는 소식. 어떤 친구는 법률가로, 어떤 친구는 사업가로, 우리는 그런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들나름의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것이 우리의 속물적 문화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귀중함을 깨닫고 서로의 존엄을 북돋아 주는 관계가 절실하지만 정작 그런 친구는 주변에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네 삶은 외롭다. 어디 좀 기댈 곳이 없을까?
막상 기대려고 하니 어디 한 군데 기댈만한 곳도 없거니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지인에게 기대는 것도 꺼려지고, 그렇다고 친구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상의 소소한 걱정거리를 풀어놓듯이 하소연하는 일도 쉽지 않다. 속 시원하게 늘 내편인 친구들은 없을까? 지금부터라도 만들 수 있을까? 이런저런 친구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던 차에 보석 같은 책을 한 권 발견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친구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친구 親舊 :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
우정 友情 : 친구 사이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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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친구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 내가 생각하는 친구란,
항상 내 편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친구 란 선택하는 것이니 내 편이 되는 사람만 선택해도 된다는 뜻에서 그런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언제나 무작정 내편인 친구란 이 세상에 없지만, 친구란 언제나 '선택적인 내편'인 것만은 맞는듯하다.
나이가 들어 친구의 개념도 조금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면 선택적 내편에 대해 우리는 지나치게 가깝게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항상 내 편임을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를 요구했기에 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저런 친구에 대해, 관계의 질에 대해 고민할 무렵 한 노철학자의 깊은 통찰이 담긴 책을 발견했다.
몇 해 전 읽은 『살면서 한 번은 행복에 대해 물어라』 의 작가인 빌헬름 슈미트(Wihelm Schmid)의 신간 『우리가 정말 친구일까』라는 책이다.
그의 책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행복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고마운 책이었다. 읽는 동안 역시나 '영혼의 치유사'라고 불리는 노철학자의 가르침이 나로 하여금 친구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정이라고 해서 다 같은 우정은 아니다. 우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책 속의 아리스토렐레스는 우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이 구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유익하므로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첫 번째 우정은 주로 ‘공동의 즐거움’을 지향한다.
두 번째 우정은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꿈꾸는 진짜 우정, 즉 세 번째 우정은 어떠한 계산도 없이,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21세기에는 여기에 ‘가상 세계의 우정’ 이 추가된다. 우정이 행복을 준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_13 Page
우리는 과연 어떤 친구일까?
당연히 우정의 기본 조건은 우정을 맺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우정을 향해 열어젖힌 마음. 관계 맺기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성향은 타고난 기질과 문화적 영향에도 좌우되지만 그 못지않게 개인의 선택도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우정을 세 가지 종류로 더 세분화하였다.
첫 번째인 ‘쾌락의 우정’은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 맺어진 관계다. 물론 즐거워지려는 욕구는 우리가 친구를 찾고 만나는 주요한 이유다. 우리는 친구와 즐거움을 나누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며, 흥겨운 대화를 나누고 친절을 주고받는다. 기분을 전환할 거리를 찾고 인생을 즐기고 재미를 추구한다. 비난할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쾌락의 우정에서 친구 사이는 복잡하지 않고 경쾌하며 유쾌하다. _24 page
쾌락이 지나고 나면 즐겁지도 않고 의욕도 없는 단계가 반드시 도래한다. 그러면 그 관계는 금세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우정은 가장 피상적인 종류의 우정이다. 쾌락이 끝나면 우정도 막을 내리고 ‘이제 그만 안녕’을 고한다. 최선의 경우 그래도 좋았던 기억은 남는다. 우리 함께 참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지.라는 씁쓸한 독백과 함께 우정은 아스라한 추억이 된다. 어쩌면 우린 이러한 시절 인연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종류의 우정은 서로에게 약속하는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우정이다. 이런 우정을 과연 우리는 우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관계가 가져다줄 이익을 살피고 그 이익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서 말한 쾌락의 영역과 지금 말한 이익의 영역에 둥지를 튼다
세 번째 종류의 우정은 아주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주목했으며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참된 우정이다. 이는 여기서 우리가 언급할 이유가 없다. 이미 머릿속에 참된 우정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정리해보자.
어린 시절에 게임과 운동 같은 공통 관심사를 가졌다해서, 성장한 후에도 무조건 가까운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성장과정에서 성격이 변하거나 취향이 바뀌게 마련이고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지면서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정의 방향은 조금씩 변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구를 원한다.
쉼 없이 나누는 대화는 행복이다. ‘재치 넘치는 친구’ 에게 건네는 다양한 이야기처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부단히 새로운 생각들이 결합되고 말을 하는 동안 점차 생각이 깊어져서 정신적 의미가 탄생한다. 우정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자주 못 보는 친구들은 자주 못 보는 연인보다 훨씬 더 독립된 각자의 세상에서 살지만 절대 성급하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위태로워지는 우정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자주 보는 친구보단 가끔이지만 친구를 봤을 때 쉼 없이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그로서 족하다.
나부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후반부에 그 답안지를 적어놓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장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선 나 자신과 먼저 친해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다시말해 모든 우정은 자신과의 우정을 바탕으로 삼는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자신과 원만하게 지내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남도 좋아하고 남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다. 자신과의 관계는 인생의 많은 것을 세워갈 기초 터전이다. 그 누구도 피할수 없다.
그래서 자신과의 관계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과의 관계를 타인과의 관계보다 앞세워도 될까?
많은 현대인들이 안고사는 기본 문제는 자기걱정이다.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에너지를 사방에서 뺏앗아가기 때문이다. 가정에선 가족이, 일터에선 온갖업무가, 거리에선 광고판이, 인터넷에선 정보와 소통의 강물이 우리의 에너지를 앗아간다. 스스로도 과도한 요구로 자신을 혹사한다. 남들보다 높이 오르려는 욕심,무슨 일이든 완벽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히려 자신을 잃게 만든다. 그러한 애달픈 노력에 함몰되어 삶의 에너지를 잃어간다. 참으로 가망없는 헛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 대한 관심은 수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모든 측면을 아우른다. 온갖 욕망과 욕구를 가진 신체, 온갖 의식적 감정과 무의식적 감정을 가진 영혼, 온갖 이상과 생각을 가진 정신 그리고 자아가 타자, 자연, 세계와 맺은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을 아우른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어떤 힘이 꿈틀대는지, 어떤 두려움, 용기, 장단점, 소망, 가능성 이 살아 숨 쉬는지 더 주의 깊게 인식하는 일이다.
쉼 없이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게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나?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소식을 전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이 내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거기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아의 다양한 측면들,자아의 익숙한 면모와 생소한 면모, 능력과 무능, 확신과불안, 희망과 두려움, 선호와 혐오, 습관과 비전의 관계를 규명할 수있다. 이처럼 자신을 향한 관심과 자기 성찰, 자신을 향한 정직함은 모두 현존의 자아와 상상의 자아를 알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풍요롭게 경험하고 비판적으로 관찰하면 자신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어느정도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파악은 자기인식의 온건하고 실용적인 형태이며 실천할 수있는 기준이다. 델피신전에 적힌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유명한 문구밑에는 이런 말이 덧붙어 있다. ”그 어떤 것도 지나치지 않게” 모든 자기 파악은 다음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외부로 부터 함부로 규정당하고 싶지 않은 현대인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일, 즉 자기규정은 자신을 향한 관심과 자기성찰, 자기 파악을 바탕으로 한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없는 현대인의 기본 상황에 답을 줄 수있는 것이 바로 자기 규정이다.
현대의 상황은 다르다.당신이 누구인지는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다음의 일곱가지 질문이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과 우정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가 특별한 정성과 애정을 쏟아 유지하고 싶은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관계인가?
둘째,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루에도 많은 경험을 한다. 허나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골라내지 못한다면 경험의 물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경험은 무엇인가?
셋째, 평생 좇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나의 믿음, 나의 길, 인생의 목표, 이상, 동경은 무엇인가? 꿈이 있어야 인생이 어디로 나아갈지. 무엇을 위해 살지 알 수 있다.
넷째, 내가 높이 사는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다섯째, 나는 어떤 습관을 유지하고 싶은가? 무엇이든 습관이 들면 애쓰지 않아도 절로 할 수 있다. 따라서 습관은 안정과 여유를 가져다준다. 어떤 성격을 습관처럼 나의 일부로 만들고 싶은가? 아량을 배푸는 여유 있는 마음, 안달복달 조급하게 굴지 않는 느긋한 자세,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밀고 나가는 에너지, 매일 웃는 얼굴. 이런 습관을 키워보는건 어떨까
여섯째, 이유없이 엄습하는 두려움이 있는가? 어떤 상처,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가? 그 상처와 아픔을 억지로 몰아내려 하지않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가? 상처를 외면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노력은 무의미하다. 차라리 그런 것들까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남는 에너지로 유익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트라우마를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마지막 일곱번째 질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곱째, 내 인생의 방향키로 삼을 만한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무조건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순간, 장면, 일, 즐거움, 대화, 생각이 있는가? 그런 아름다운 순간, 아름다운 것들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한한 힘을 제공하기에 아무리 고단한 인생의 고개도 거뜬히 넘을 수 있게 도와준다.
만약 천상으로 올라가 저 우주의 온갖 비밀과 아름다운 별자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도 이러한 즐거움을 함께 나눌 사람 없이 오롯이 혼자라면 전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옛말은 꼭 맞다.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언제나 기댈수 있는 누군가를 찾게 마련이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인생 최고의 버팀목이다. _키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