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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똑띠 Nov 14. 2023

아빠는 아닌데, 자녀 교육서는 읽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 미공개분 2] + [출간소식]

독자님들, 안녕하신지요? 분명 지난주까지는 "이렇게 날이 따뜻해서야, 수능 보는 느낌이 나겠나..." 싶었는데 말이죠. 비가 조금 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야말로 살을 에는 바람이 붑니다. 찬바람에 다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건강" 얘기가 잠깐 나와서 말인데...  보통 건강하려면 잘 먹고, 잘 자고, 꾸준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드는 생각으로, 이 반대가 더 맞는 말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하려면 먹고, 자고, 운동하고, 스트레스 관리에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운동하고, 스트레스 덜 받으려 건강해야 한다고요. 몸이 아프면 먹는 것 부터가 고역이지 않습니까. 행복은 먹는 데서 시작되는 데 말이죠.


"먹는" 얘기가 잠깐 나와서 말인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사탄)에게 시험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래밭에 깔린 저 돌맹이들을 너의 "권능"으로 빵으로 바꾸는 걸 보여주기만 한다면 내 너를 이 세상의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권능"을 사사로이 쓰는 사욕(私慾)이 예수에게 있음을, 예수도 그저 보통 인간임을 증명하고 싶었겠지요.


이에 예수님은 멋있게 받아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양식 중의 양식은 마음의 양식이지요. 마음의 양식은, 단연 책으로 먹는 것이 으뜸이고요.


그 좋은 책 중에 저의 책이 한 권,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하하. 이 말을 하려 예수님 운운한 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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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일정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 아이 자랑하는 말 대신, 관련 링크를 올립니다. 교보에서 주문하시면 오늘(14일) 출고된다네유.


하하하하하.




<아빠는 아닌데, 자녀 교육서는 읽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난 뒤로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청바지에 걸쳐 입던 티셔츠는 면바지 위로 걸친 옥스퍼드 셔츠로 바뀌었고, 강의 중간중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던 햄버거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 급식으로 바뀌었다. 신축 빌라 단칸방은 방 세 칸짜리 구축 아파트로.


정신적인 변화도 적지 않다. 학생으로서 동경하고 외부인으로서 듣기만 했던 ‘교사’를 직접 겪고서야 보이는 학교 안 이야기. 내부자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여러 속사정들. 속사정을 털어놓자니 철없는 사회 초년생의 징징거림으로 보일까 봐,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던 선배들에 대한 누가 될까 봐 자처한 바보 행색.


이러한 물질적, 정신적 이분법이 참 유명무실하다 느끼는 일이 매일 있으니, 흔들리는 내 마음에 평화를 주던 두 가지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과 주말의 여유를 같이 하는 책, 그리고 일상의 분주함을 같이 하는 아이들. 이 둘이 점차 내 안에서 만나더니 이리저리 뒤엉켜 또 다른 변화를 한 가지 만들어 내었다.


어느덧 ‘자녀 교육’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


지금껏 쓰고 있는 글의 중간 어디에선가 나는 결혼을 했다. 총각 선생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어느새 총각과 아빠 그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중이다.


아직은 아빠가 되지 못했기에 당연 육아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중간 과정은 모두 건너뛰고 ‘자녀 교육’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을까? 이 모두는 아이들 덕분이다. 아이들을 만나고서 교육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덕이다.


오래전에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눈앞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될 사람’을 가르쳐야 해요.”


참 좋은 말씀이라 여겨, 이날부터 항상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실천할 기회는 오지 않았더랬다. 오랫동안.


임용고시 공부하느라 단칸방에 가로막혀 살던 오랜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학원 강사 일을 하며 단칸방에서 출퇴근했던 몇 년의 시간 동안 교수님의 말씀은 마음 구석 저 어딘가에서 먼지만 쌓여갔더랬다.


학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심성도 정말 밝고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강사와 원생은 수학 시험을 매개로 수요와 공급이 맺어진 관계였을 뿐이다. 원할 때 ‘등록’하고 원할 때 ‘끊는’. 그렇고 그런 관계.


그러니 자연스레 수요에 맞추어 공급을 하게 되더라. 아이의 컨디션보다 우선 숙제량을 챙겨야 했고, 아이의 에티켓보다 우선 진도를 챙겨야 했고, 아이의 결석 사유보다 우선 보강 일자를 챙겨야 했다.


부분은 전체보다 작을 수밖에 없는데, 작은 것을 큰 것보다 앞서 생각해야 했다. 공자님이 알려주시길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알아야 한다知所先後”라고 하셨는데, 아는 대로 살지 못해 괴로웠다.


그러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니 정말이지, 반갑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나도 열여덟 고등학생이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덧 서른이 넘어 아이들을 만났으니 참으로 길고도 긴 세월이었다.


어찌 보면 이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기다렸지 않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약속 시간에 십 분만 늦어도 슬슬 초조해지는데, 무려 10년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누군가의 오랜 꿈이었다는 걸 알까.     


아이들은 자신이

누군가의 청춘임을 알까.



-


강사 시절 늘 하던 대로, 아이의 ‘오늘’을 챙기는 좋은 선생님이 될 수도 있었다. 아이가 존댓말을 잘못 쓰든 말든, 지각이 잦든 말든, 험한 말을 쓰든 말든, 규칙을 어기든 말든, “응, 그랬구나”, “애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학생이지 다 잘하면 어른이게?”라 말해주는 좋은 선생님.


잔소리, 싫은 소리 않고 수요와 공급에 발맞추는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될 사람’은 어떻게 챙기나? 아이의 ‘오늘’이 이렇다 하여 ‘내일’도 그래야 하나?


아이를 사회의 리더로 키우고 싶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기를 원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돕고 싶다면, 그렇다면 아이의 ‘오늘’을 복붙하여 ‘내일’에 떠넘길 수는 없지 않나?


지금 당장 아이를 성인군자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실내화 실외화는 구분할 줄 알고, 지각하지 않고, 공손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고서는 학교 밖으로 보내야 할 것 아닌가? 정말, 정말, 정말. 아이의 ‘내일’을 ‘오늘’에 맡겨도 괜찮나?


정말?



-


아이들을 가까이서 하루 종일 보다 보면 이런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간다. 수업 연구만이, 어떤 내용을 어찌 전달할지 고민하는 것만이 전부였던 강사 생활에 덧붙여 새로운 고민거리가 늘어난다.


이제는 수업에 덧붙여 아이의 어떤 행동을 어찌 수정해야 할지 고민하는 때가 많아진 것이다. 잔소리, 싫은 소리 말고 다른 방법을 알고 싶었다. 나도 ‘좋은 교사’이고 싶었다. 이런 고민의 와중에 들려온 풍문 하나.


언젠가 방송에서 오은영 박사님에게 누군가 물었단다. “박사님은 자녀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화내신 적이 없으세요?” 하였더니 박사님은 “저는 아이들에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라 말씀하셨다고 한다. 물은 사람이 깜짝 놀라서, 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 다시 물으니 박사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대신에↗ 엄. 하. 게. 말했어요.”


풍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나는 이 일화를 듣고서 ‘이거다!’ 싶었다. 대체 그 ‘엄하게’ 말하는 방법이 뭔지 좀 배워봐야겠다. 그리하여 자녀 교육서를 찾아 읽게 된 것이다.


모든 부모님은 자상하고,

동시에 엄하니까.     



-


서점에 찾아가 난생처음으로 자녀 교육 코너를 한 번 훑어본 소감은 이러했다.


“요즘 어머니들은 다들 자식 한 둘쯤 서울대 보내기는 기본인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가 직접 쓰셨다는 책들은 어찌 죄다 ‘꼴등 아이 서울대 보낸’ 이라던가 ‘아이 셋 서울대에 보낸’ 같은 문구로 표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법에 대한 얘기도 서울대 정도는 나와줘야 책이 되는 것처럼, 자식이 서울대 정도는 나와줘야 자녀 교육도 빛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며칠 전에 읽은 ‘모든 교사를 1타 강사로!’ 운운하던 신문 사설이 생각났다. 잘된 교육과 잘된 공부의 기준이 어쩌다 ‘서울대 입학’이 된 것인지. 입맛이 씁쓸했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문득 떠오른 숱한 기억. 이쁜 표지에 속아 꺼내 들었다 실망했던 숱한 책들. 겉이 실하고 속은 허했던 숱한 서점의 기억. 그렇다면 반대로 겉이 허하고 속은 실한 책도 있지 않을까? ‘서울대’ 운운하는 겉모습도 그 속사정은 조금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한번 속아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책을 손에 쥐고 살펴보고 눈에 띄는 대로 한 권 읽고, 두 권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 권은 집으로 데려왔다. 과연 어머니들에게는 배울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겉에 쓰인 ‘서울대’ 정도로는 속에 적은 ‘어머니’를 소개하기에 모자라고도 모자랐다.


사실,

서울대는 한 명의 어머니에게 쨉도 안 됐다.



-


그간 읽은 여러 자녀 교육서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긴 ‘아이 서울대 보내는 꿀팁’ 하나를 소개해보려 한다. ‘윤인숙’ 어머님(이하 작가님)이 쓰신 『서울대 삼 형제의 스노볼 공부법』에 소개된 방법이다.


하루는 작가님이 사시던 아파트에 정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조금 오래된 아파트라 정전이 가끔 일어나곤 했기에 정전 자체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때가 밤늦은 시간이었다는 것.


아이들이 곧 있으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살던 곳은 12층 집이라 컴컴한 계단을 아이들이 걸어 올라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때 작가님은 어찌했을까? 이번 정전을 기회로 아이의 ‘도전 의식’을 자극해 주었을까? 세상만사 자기 편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일종의 ‘겸손함’을 알려주려 아이들이 직접 계단을 올라오게 했을까?


아니다. 작가님은 그저 아이들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아파트 현관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정전으로 현관 불도 들어오지 않는 시커먼 1층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다 만나고선,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고 어두운 계단을 같이 오르셨다고 한다.


훗날 세월이 지나, 아이들이 서울대에 입학한 뒤로도 아이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더란다.


그런데 밤중에 아이 마중 나간 게 무슨 꿀팁이냐고?


오래전, 나는 학원이 끝난 늦은 밤에 불 꺼진 시장통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밤늦게 강의를 마치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던 날, 비를 쫄딱 맞고 돌아온 시커먼 원룸 방과 주황빛 현관등 그 아래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가만히 보았던 지리멸렬함도 기억한다.


돈 한 푼 없고 가진 것 없던 어린 시절의 한 날은 굉장한 행복이었고, 유복하고 자신감 넘쳤던 어느 한 날은 처량한 고통이었다. 그 이유를 우리 모두 안다.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임을 이미 알고 있다.


-


우리 모두 버거운 세상에서 ‘나’를 기다려줄 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나? 굽은 어깨 가지고 돌아오는 저 길 끝에, 나 한 명 마중 나와줄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살지 않나? 그걸 바라고, 거기서 힘을 얻고. 그렇게 살지 않나.


남이 보기엔 볼품없어 보이는 선물이라도, 그 한 사람만큼은 나의 정성에 고맙다며 소중히 간직해 주는 그런 사람. 남이 보기엔 크지 않은 성과라도, 그 한 사람만큼은 정말 고생했다, 멋있다 인정해 주고 잘한 건 띄워주고 잘 못한 건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그런 게 결국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바라는 모든 것 아닌가?


그 바람. 세상으로부터 받고 싶은 든든함. 작가님은 그걸 쟁취하고 손에 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기 계발적 삶을 살 수도 있었겠으나, 그저 어두운 밤에 아이들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아이에게 베풀고, 나에게 돌이켜보아 좋지 않았던 것은 아이에게 베풀지 않는 것. 받는 것 없이 마냥 아이의 든든함이자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것.


내가 읽은 꿀팁이란 이런 것이다. 나에 비추어 바라는 바를 아이에게 베푸는 것. 이것을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하는 것이다.


20년의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


이런 성실함을 위해선 매일매일 강력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할 것 같으나,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이 목표라면 얘기가 다르다.


1년, 2년도 아닌 20년을 내다보자면, 역설적으로 ‘내 아이 서울대 보내려고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흩어버려야 한다. 이걸 고집, 아집, 불교에선 아상(我相)이라 하던가?


자녀 교육서를 쓴 숱한 어머님이 어떻게 미리 아이가 서울대 가는 미래를 알고 있었겠나? 어머님들은 단체로 예지몽이라도 꾸는 능력이 있으셨던 걸까? 만약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아마 책 제목은 ’우리 아이 서울대 가는 꿈 꾸기‘ 정도로 바뀌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정해진 미래에 사로잡혀선 20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할 수는 없다. 되려 아무 생각이 없어야 오래가지 않나. 내비게이션만 뚫어지게 보고 있어선 장거리를 가지 못한다. 라디오 틀고, 음악 듣고, 옆 사람과 대화하며 머리를 비워야 멀리 간다. 김연아 선수도 말했다지 않나.


“그냥 하는 거지 뭐.”



-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일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습관’이라 알려준다.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듯, 어른이 좋은 습관 갖는 것도 당연 중요하다. 그 아이가 커서 된 사람이 우리니까.


그러니 아이를 ‘될 사람’으로 대하기가 습관이 되려면, 그래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꾸준히 지켜주는 ‘그 한 사람’이 되어주려면 어찌해야 하나?


결국 ‘나부터 잘하자’로 돌아온다. 습관적으로 지지하고, 습관적으로 좋은 사람 되기. 습관적으로 좋은 부모 되기. 그렇게 하다 보면 오래가고, 오래 가면 멀리 가고, 멀리 가면 돌아오는 이치가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삼 형제가 책에서 말하더라.


세상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고.     



-


자아! 그래서! 화내지 않고 엄하게 말하는 방법을 마침내 깨달았냐고?


뭐, 별다른 방법이 있나. 지각이든, 공손함이든, 실내화든. ‘내가 먼저 잘하자’ 이런 거 아닐까? 내가 잘 지키면, 좋게 말해도, ‘웬만치’ 알아서 잘하더라.



그렇다고 화가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고.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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