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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똑띠 Nov 09. 2023

노는 게 제일 좋아

["선생님의 목소리" 미공개분 1]


분량 조절을 위해 “선생님의 목소리”에 미처 실리지 못한, 아쉬운 미공개분을 선보입니다.

읽는 동안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다다음주,

11월 22일 출간 예정입니다.



『호모 루덴스』라는 책이 있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라는 분이 쓰신 책으로, 지금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짙은 귤색 표지가 한편으론 귀엽다. 두꺼운 책 덩치와 고고학과 인류학을 넘나드는 깐깐한 내용에 깜짝 놀라 도망칠지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우리 그런 책 아니에요오!”라 손짓하는 색깔.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게 달달하기만 하던가? 아무리 귤색 표지가 이쁘다 한들 펼쳐본 책의 속사정은 녹록지 않다. 완독하기 만만찮은 책이다. 표지엔 ‘청소년 권장 도서’라 적혀있는데, 과연 ‘권장’할 만하다. 청소년이 자발적으로 재미 삼아 읽을 만한 책은 아니란 말이다.


아, 물론 성인이라 해서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모두 마음만큼은 이팔청춘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모 루덴스』는 개정판까지 만들어졌으니, 그만큼 꾸준히 찾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데…. 그 사람들 중의 하나가 여러분 눈앞에 있다. 몇 년 전 서점에서 눈에 띄는 귤색 표지에 속아 책을 꺼내 펴보았던 바로 나.


막상 꺼내 드니 느껴지는 책의 두께와 만만찮은 내용에 흠칫 놀랐다가도 아득바득 완독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지적 허영심 때문이었다.


표지에 커다랗게 적힌 라틴어 ‘HOMO LUDENS’. 그 아래 적힌 『호모 루덴스』. 그리고 ‘요한 하위징아’라는 멋들어진 작가명. 왠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열 배는 멋져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0 곱하기 10은 0이었다는 사실. ‘허영심’이란 남는 게 없으니 허영심이라 부르겠지만, 그래도 남는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꼭지를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라틴어 HOMO LUDENS. 우리말로 풀자면 ‘놀이하는 인간’. 줄여 쓰면 ‘노는 놈’. 더 줄여 쓰면 ‘백수’. 『호모 루덴스』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가지를 말할 뿐이다. 옛날 사람들이 하도 심심하여, 반복되는 나날에 싫증이 나서 이런저런 놀이를 해보았는데, 이게 세월이 가며 점점 전쟁이니 스포츠니 예술이니 하며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길게 서두를 뽑냐고?


음, 언젠가 개그맨 박명수 씨가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배고플 때 뭐가 나온다”라고. 귤 색깔 『호모 루덴스』는 수백 쪽의 두툼한 글자들을 내 머릿속에 와르르 풀어놓을 땐 언제고, 딱 한 줄만 남겨놓고 주섬주섬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호모 루덴스』에 얽힌 감상을 한 줄 정리하자면 이렇다는 말이다.     


“사람이 심심할 때 뭐가 나온다.”     


-


가만 보면, 사람만큼 신기한 생명이 없다.


아주 오래전, 지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시절, 사람도 바닷속을 둥둥 떠다니던 단세포에 불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세포 생물이 되고,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다가 뭍으로 나왔고, 어쩌고저쩌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두 발로 걷고. 그러다 어찌저찌 죽지 않고 진화를 거듭하더니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 사람이다.


‘어쩌고저쩌고’와 ‘어찌저찌’를 좀 있어 보이는 말로 ‘진화 압력’이라 하고, 좀 더 풀어 설명한 것을 ‘진화론’이라 부른다. 그런데 ‘진화론’이란 단어가 탄생 되기 전에는 진화라는 것이 없었겠나? 당연히 있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 중에서 딱 ‘사람’만 꼬집어 진화가 적용된 것도 아니다.


하늘이 얼마나 두텁고 땅이 얼마나 넓은데, 지구가 오직 사람 하나만 유독 챙겼을 리가. 모든 동물과 식물도 유구한 세월 동안 각자의 고군분투를 겪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길가의 흔한 잔디 한 잎까지도. 같은 하늘과 땅을 가지고서도 각기 다른 갈래로 뻗쳐 나온 것이 꼭 부모 밑의 자식들 같다. 한 지붕 아래 한솥밥 먹고서도 제각각이니.


그런데 요상하게도 이 ‘사람’이란 자식만큼은, 다른 애들은 다 조용조용 사는데 유독 자기 혼자 ‘심심함’을 견디질 못하고 발발거린다. 어디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도 같은 자리에 있기 지겹다고, 같은 ‘포오즈’로 서 있는 게 지루하다고 툴툴거리진 않는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햇볕이 쬐든 그냥 묵묵히 있다.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든 강아지가 왈왈거리든 관심 없다. 묵묵하다.


강아지나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던 시절, 식당 뒤로 나오는 자투리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고양이와 개가 많이 있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따라 먹어 그런지 아주 토실토실, 덩치가 컸다. 우리는 걔들을 총칭해 ‘짬타이거’라 불렀다.


군대에서는 남는 게 시간이라 하릴없이 짬타이거들을 보고 있던 일이 많았는데, 녀석들은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 그런가. 뭐랄까. 아주 팔자가 폈다고 해야 하나. 걔 중 누가 개고 누가 고양인지 모른다는 듯 유유자적 섞여 걸어 다니질 않나, 햇볕 좋은 날에는 축 퍼져 누워있지를 않나.


짬타이거를 유혹해 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군대에서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낚싯대처럼 생긴 고양이 장난감을 들고선 신나게 짬타이거 앞에서 촐랑촐랑 흔들어댄다. 짬타이거도 한때는 장난감에 홀린 듯 신나게 놀다가, 예고 없이 휙 돌아서서는 ‘거, 나는 관심 없소’라는 시큰둥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괜한 사람만 시무룩해진다. 짬타이거를 즐겁게 해준다는 명분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 고양이 장난감을 손에 쥐고선 축 처진 그 모습이, 영락없이 고백에 실패한 사내의 뒷모습이다.


이런 군상을 가만 보고 있자면 대체 누가 누구랑 놀아주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


시험 기간이 끝난 학교는 마치 그 시절 군대와 같다. 아이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제한된 환경에서 감당해야만 한다. ‘시험’이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지기만을 그토록 바랐건만, 막상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니 정신적인 적막함에 아이들은 귀가 먹먹한 것이다.


수업은 여전히 이어지건만, 시험이라는 속박이 사라지니 아이들은 수업이 마냥 가볍기만 하다. 학교 밖에선 영화를 보고, 밀린 드라마도 보고, 카페도 가고, 좋아하는 마라탕도 먹으러 다녔을 텐데.


아이들은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을 일정한 교칙 안에서 즐기기가 쉽지 않나 보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 보자면 어쩔 수 없이 나 어릴 적이 생각난다. 나 어릴 적엔 굳이 시험 기간이 끝나지 않더라도, 학교를 가지 않더라도 마냥 심심했다. 요즘 아이들 가지고 노는 스마트폰이 있기를 하나, 컴퓨터가 있기를 했나. 심심함이란 일상의 다른 말이었다.


TV 채널도 네다섯 개밖에 안 되던 시절. 심지어 그 몇 안 되는 채널도 오후 한나절엔 화면조정을 한다며 방송을 쉬었다. 집 밖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요즘 흔한 코인 노래방이 있기를 했나, 카페가 있기를 했나. 그나마 있는 오락실은 불량 청소년들의 쉼터였고, 영화관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요즘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놀 만한 장소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가끔 듣지만, 그 시절엔 더 없었다. 문화적 황무지였달까.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그야말로 시간이 철철 흘러넘쳤다. 넘치는 시간이 막막하여 나는 가만히, 정말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있기만 했더랬다.


요즘 말로는 ‘멍때리기’가 당시에는 생활의 일부였다. 아버지가 외동아들의 멍때리는 꼴을 보실 때면 꼭 이렇게 물으셨다. “심심하나?”


그러면 순진한 어린 나는 뭐라 답했겠나? 심심하니까 심심하다고 하지. 그러면 아버지는 무심히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휙 사라지셨다.     


“심심하면…. 공부해라.”     


-


그래서 공부했다.


확실히 공부를 하면 심심하진 않더라. 대신에 괴로웠지. 비자발적인 공부는 지금도 괴롭다. 공부가 재밌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던데….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공부라도 안 하자니 놀거리도 딱히 없어서, 공부로 대신 시간을 채웠을 따름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나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좌우 반전된 오버랩. 아이들은 공부라는 괴로움이 소거되어서야 심심함을 느낀다.


그러더니 급기야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 사물함에, 교탁 위에 책을 쌓아두고 읽는다.


그렇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책 좀 읽어라”, “독서 좀 해라” 잔소리할 때는 ‘거, 나는 관심 없소’라는 듯 시큰둥하더니. 이제는 제 발로 옹기종기 모여 도서관에 간다. 모든 학생이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아이들이 심심함을 견디는 방법엔 책 읽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아이들은 칠판에 희미하게 새겨진 눈금 위로 오목 두기를 하고 있고, 어느 아이들은 물이 반쯤 찬 생수통을 눈앞에서 휙휙 던지고 있다.


이게 뭐 하는 놀인가 가만 보니, 공중회전 한 생수통이 아래쪽의 물 무게로 인해 똑바로 선 자세로 낙하하기도 하는 것이다. 체조 선수 마냥 차렷 자세로 낙하하는 생수통을 보려고 쉬는 시간이 다 가도록 던지고 있다.


그뿐이랴. 교실 앞뒤로 너른 공간에는 어느 아이들이 서넛씩 모여 앉아있다. 이건 또 뭐 하는 놀인가 다가가니, 다 큰 남정네 학생들이 다리를 꼬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고서 둘러앉아선 공기놀이를 하고 있다. 요염한 자태가 흡사 어시장에 모여앉은 인어공주 같다.


나는 ‘공기’라는 사물 자체를 근 20년 만에 보았다. 대체 21세기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녀석들은 어디서 공기를 구했나.


아니, 공기를 파는 곳이 아직 있는가? 아니, 얘네는 대체 ‘공기놀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떠올린 거지?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다.


‘창의성’이란 특별한 방법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창의성을 영어로 풀면 ‘Creativity’, 즉 ‘Create(창조)’ 할 수 있는 ‘Avility(능력)’ 정도가 된다. 그러니 창의성이란 뭔가를 새롭게 해낼 능력을 말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거나.


그런데 이 ‘새로움’, ‘창조’라는 것은 해리포터가 마법 부리듯 뿅! 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없는 데서 있는 걸 만들 수는 없지 않나. 없는 걸 어떻게 있게 만드냔 말이다. 그런 것이 만약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고유한 권능이겠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랄 일은 아니다.


세상의 어느 진기한 물건이라 한들, 가만히 뜯어보고 요모조모 살펴보면 기존의 것을 새로운 관점과 방식으로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그들을 한데 모은 관점과 방식이 워낙 신기하다보니, 이런 신기함을 쉽게 ‘창의적’이라 따로 부른다. 하지만 아무리 ‘창의적’이라 한들 하나님이 삼라만상 만들듯 ‘뿅!’하고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창의성’이란 사실 거짓부렁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의 ‘요한 하위징아’ 작가님이 말씀하셨지 않나. “사람이 심심할 때 뭐가 나온다”라고.


-


가끔 비좁은 집 안 청소를 싸악 해보면 새롭게 생긴 ‘비어짐’에서 새로운 ‘쓸모’가 생긴다. 선반을 비우고, 널브러진 물건을 정리하면 거추장스러운 잡화가 사라지니 물건을 보관할 새로운 공간이 생기고 시야가 트인다.


마냥 쾌적함을 누릴 수도 있다. 가로막힌 물건이 적으니 환기도 더 잘 된다. 널찍하니 뒹굴뒹굴 굴러다닐 수도 있다.


요즘 집값이 하도 비싸니 한 평 남짓 공간에 수백 수천만 원씩 하던데, 물건 정리만으로 그 돈을 버는 것과 똑같으니 이만한 재테크도 없다.


무생물투성이인 집 안 공간도 이러한데, 분명 우리 마음과 정신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 일종의 정신적 미니멀리즘이랄까.


꽉꽉 채워진 계획과 스터디 플래너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빽빽하게 채운 일상이 숙성되고 발효되려면 약간의 여유도 필요하지 않나. 진공포장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실제로 늦둥이 중에서 영재가 많이 배출된다고 한다. 아동 심리학자들이 이유를 말하길, 나이 많은 부모는 이런저런 사회 경험을 통해 ‘그거, 사실 중요한 거 아니더라’는 것을 많이 깨달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아이 기를 때도 작은 실수를 ‘실패’라 규정짓거나 ‘꼭 해야 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아 아이들의 마음이 더 크게 자란다는 것. 기대가 적으니 성취가 크다.


고층 빌딩 숲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탁 트인 하늘과 푸른 자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더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는 연구도 있다.


세계의 훌륭하다고 소문난 학교와 대학교들은 모두 넓은 땅에 낮은 건물로 되어있다. 기왕 정해진 땅 넓이라면, 조경 공간이나 인도 같은 부가 면적을 고려했을 때 건물을 높게 짓는 것이 효율적일 텐데도 낮은 높이를 고수한다.


정리 정돈을 잘해야 공부를 잘한다는 말이 아니다. 아인슈타인도 자기 연구실이 그렇게나 지저분했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그런 아인슈타인도 하루에 꼭 한두 번은 조용한 오솔길을 걸었다. 혼자 걷기도 하고 동료 학자들과 함께 걷고. 그런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꼭 창의성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겐 마음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너무 천방지축 뛰어다녀선 안 되겠으나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이미 ‘꽉꽉 채워진 시간’으로 편향되어 있다.


조금 여유를 갖는 것도 좋지 않겠나. 그래야 공기놀이도 하고, 오목도 하고, 수다도 떨고, 생수통도 던지고. 그러고 놀지.


-


신변잡기 수준의 놀이가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요한 하위징아 아저씨가 말했지 않나. 그렇게 시작된 놀이가 우리 인간의 ‘문명’이 되었다고.


햇볕에 늘어진 짬타이거의 뱃살이 부러울 때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짬타이거는 짬타이거다. 사람은 군대를 제대하여 사회로 나왔지만, 짬타이거는 거기 남아있다.   

  

쉬는 시간. 교실 한쪽엔 책 읽는 아이들, 교실 한쪽엔 오목 두는 아이들, 교실 앞뒤로는 공기놀이하는 아이들. 생수통 던지는 아이들, 벽에 기대고 책상에 걸터앉아 수다 떠는 아이들, 소란 중에 세상모르고 숙면을 취하는 아이들을 본다. 아수라장이다. 그야말로 난리통이다. 엔트로피가 철철 넘친다.


그렇게 넘치던 엔트로피도 수업 종이 울리면 금세 파도가 가라앉듯 잔잔해진다. 엔트로피의 증가와 감소. 그 순환을 아이들에게서 본다고 말하면 너무한 과대포장일까?


슈뢰딩거는 생명이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고 하였다. ‘엔트로피 증가’라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며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생명의 힘이라는 말이다.


감히 나는 아이들이 ‘양의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말하고 싶다. 아니, 먹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산다’라고 말하기엔 아직 공기놀이 정도로는 부족하니까.


쉬는 시간이면 국영수 문제집 대신 책만 주야장천 읽는 아이에게 “책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 말하던 세상이 있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문해력’이니 ‘독해력’이니 따지며 “공부 그만하고 책 좀 읽어”라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이들 손에는 스마트폰이니, 태블릿이니 하나씩 쥐어져 있다. 손에는 스마트폰. 머릿속에는 플래너.


아이들은 심심할 여력이 없다. 나는 아이들이 좀 심심하면 좋겠다. 아니, 기왕이면 세상이 좀 심심해지면 좋겠다. 시험 기간이 끝난 학교처럼.     


“그래야 뭐가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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