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고요

공부에 관한 최소한의 공부(03)

by 김똑띠
기회가 오는 곳에서 기다린다.
-先處戰地而待敵者佚-
-後處戰地而趨戰者勞-


[손자병법]에서 손자(손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자신의 철학을 요약하며 쓴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2000년이 훌쩍 지난 여러분의 오랜 학창 시절에 보내는 위로의 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지요? 저의 처제가 그러하듯 배우고 공부하는 일을 앞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인강도 학원도 아닌, 학창 시절이라는 공부 경험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리며 견디기만 했던 기억인 학창 시절. 그 시절은 주인도 모르게 소리 없이 오늘을 기다려주었습니다. 공부의 날을 기다리며 말이죠.


그렇다고 하여 학창 시절의 추억을 모두 헤집을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 몰래 수업 중에 과자를 먹던 일이나 지각하지 않으려 서두르던 등굣길. 지루한 수업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시간과 마음 맞지 않는 녀석과 겪었던 불화. 캐다 보면 좋고 나쁜 기억은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요.


다행히도 우리는 ‘최소한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한 가지 기억만을 꺼내고, 나머지 기억은 다시 고이 묻어둘 겁니다. 낭만이 지나치면 다소 어리석어지는 법이기도 하니까요.


자, 교과서 꺼냅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기억은 바로 ‘교과서’입니다.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혹은 그와 정반대였던 교과서에 최소한의 공부를 위한 추진력이 있습니다. 학년과 과목을 불문하고 모든 교과서는 학생이 홀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거의 유일한 개념서이자 문제집이며 수험서입니다.


교과서만으로 대학 입시 준비가 충분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도 아닐뿐더러, 입시는 이 글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어렵고 많은 문제 풀이가 공부라는 단어의 뜻 전부였다면 교과서보다는 두꺼운 문제집을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모든 학교와 선생은 ‘교과서’라는 말을 잊고 문제집만으로 수업을 꾸렸겠지요.


허나 학교와 선생뿐만 아니라 공부 꽤나 한다는 학생이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하라 권하는 이유는, 오직 교과서에서만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흐름’이라 부릅니다.



친해지는 데도 순서가 있다


1) 우연히 알게 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죠. 호감을 사기 위해서든, 얻어내고 싶은 것이 있어서든. 이 사람과 가까워져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우선 인사를 하고 어색함을 깨는 일부터 해야겠지요.


2) 통성명을 하며 이름을 알고 연락처도 받아야겠습니다. 대뜸 이름과 연락처를 받기에는 부적절하니, 적절한 농담도 해보고 공통점을 찾아 이야깃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3) 후에는 이 사람의 주변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SNS나 지인을 통해 관심사나 취향 등을 알면 연락하며 지낼 때에 더욱 쉽게 가까워질 수 있겠죠. 기회를 보아 한두 번 만나며 익히 알아두었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호감을 쌓아갑니다. 잘못 알게 된 정보 때문에 이런저런 착오가 생기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착오를 고쳐가는 과정 때문에 말을 더 섞게 되고 그 사람의 다른 면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4) 이러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라포를 쌓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는 상황을 보아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연인이 된다거나 보험 설계를 권하는 등 처음에 목표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예상 밖의(?) 거절에 좌절하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나간 일련의 일을 거치지 않고 곧장 목표만을 들이밀 수는 없겠지요. 결승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출발선에 먼저 서야 하는 것, 그 이치는 피해 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거쳐야 하는 이런 일련의 흐름은 꼭 교과서의 흐름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볼까요?



배운 대로


1)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는 꼭 새로운 배울 거리(개념)가 등장하는 맥락을 소개하며 시작됩니다. 관심과 동기부여 단계라 부릅니다. 이를테면 ‘동진’이라는 아이가 겪은 짧은 이야기가 나오죠.


“동진이는 어느 날 아빠와 함께 경제 뉴스를 보게 되었어요. 화면에는 숫자와 그래프가 복잡하게 나타났고, ‘주식’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렸습니다. 동진이는 아빠의 눈을 사로잡은 ‘주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어요.” 하는 식입니다.


2) 이어서 단어 공부 단계가 이어집니다. ‘주식’이라는 이름의 뜻과 함께 다소 딱딱하고 지루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단어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한 예시들도 나오죠. “주식은 기업의 소유권(지분)을 일정한 단위로 나눈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의 가치가 1억 원이고 이를 1만 주로 나누었다면 …”이라는,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를 주고받는 통성명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주식과 간단한 통성명이 끝났다면, 그에 대해 이모저모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문제풀이 단계라 할 수 있겠네요. 간단한 연습문제를 몇 가지 풀면서 주식의 여러 측면을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교과서에 있는 여러 연습문제, 예제, 유제가 대표적이지요. “50억 원 가치의 회사가 5만 주를 발행했을 때 1주의 가격은 얼마일까?” 같은 기본적인 응용을 해결해 봅니다.


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그저 알아가는 것 자체가 관심인 것처럼, 교과서에서 제시되는 거의 대부분 문제는 그런 고로 객관식이 아닙니다. 주관식이거나 서술형, 발표형, 토론형처럼 학생으로 하여금 정답의 유무를 떠나서, 관심 대상을 알아가는 ‘흐름’을 따라가도록 이끄는 데 교과서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주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기본적인 뜻을 알고 이 단어가 사용되는 여러 문장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면 이제 실전으로 나설 차례입니다. 활동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관심 기업을 하나 정해 기업 정보(사업 내용, 실적, 뉴스)를 찾아보고, 주가가 변한 이유를 기사에서 찾아 발표해 보자고 권하는 것이죠. 앞서 등장했던 동진이는 아빠와 TV를 보며 소소한 대화를 나눠볼 수도 있겠네요.


교과서에서는 보통 이 단계를 단원 마지막 한두 페이지에 수록해 두었습니다. ‘체험활동’, ‘학습활동’처럼 다소 딱딱하거나 ‘창의력 쑥쑥’ 같은 말랑한 제목을 달아두고는 합니다.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수업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여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자각하는 공부


여러분은 운동과 노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저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면서도 한동안 이 차이를 뚜렷이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땀 흘리고 고되며, 끝난 후에는 드러눕고만 싶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비슷해 보였거든요. 알지 못하였음에도 나서서 찾아보지는 않았으니, 운동을 좋아할 줄만 알았지 공부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건강 관련 서적에서 이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말하길 운동과 노동의 차이는 ‘신체 자각’에 있다고 하더군요. 어떤 동작을 하며 어느 부위를 움직이는지, 얼마나 지속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통제하는지. 즉, 신체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 운동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노동은 신체를 사용하는 일이지만 몸이 아닌 목적을 이루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하였지요.


운동과 노동 모두 몸을 쓰며 힘을 들이는 일이라는 것에 큰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자각’이라는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소한 차이가 건강과 골병이라는 크나큰 차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야말로 대동소이(大同小異)라 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를 보는 눈도 그렇습니다. 분명 같은 교과서를 들고 학교를 다녔음에도 누구는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누구는 문제집보다 못하다며 한두 번 펴보기만 하고 말았던 이유는, 교과서가 안내하는 ‘흐름’에 대한 자각의 차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교과서의 흐름'을 처제의 경제 공부 계획으로 옮겨보겠습니다. 무엇을, 어떤 순서로 할지 까지요.



안녕하세요.

필명 김똑띠, 본명 김동진 인사드립니다.


https://youtu.be/-izIsnTLT-Y


마누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플러스 마누스>에 인터뷰가 업로드 되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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