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관한 최소한의 공부(02)
선행학습은 교육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착한 행동이라는 선행(善行)도 물론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노골적인 의미로서의 선행학습을 말합니다. [논어]에서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이라 하여 "배우고 시기에 맞추어 익히라"라고 하였으니, 배우는 일은 시기를 앞서야 합니다.
미리 배우고 때가 되면 익히는 것이지요. 공교육에 몸담은 교사가 선행학습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다니 다소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기왕 여기까지 글을 읽었으니 잠시만 시간 내어 어느 교사의 변명을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먼저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커피집을 다녀오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빌딩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죠. 몇 분쯤 지났을까요.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금속 문이 양쪽으로 미끄러지며 열렸습니다. 문 사이로 벌어지는 틈새 속으로 들어가려 발을 옮기려던 그때, 엘리베이터 안으로 무척이나 분홍빛이 돌던 어느 꼬마 소녀가 보였습니다.
분홍 원피스를 입고 크림색 패딩을 입은 아이. 머리는 하나로 모아서 분홍 리본으로 묶었던 아이가 엘리베이터 정중앙에 바르게 서 있었습니다. 배꼽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아이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깊이 숙이며 분홍 리본을 찰랑거렸습니다.
"안녕하세요!"
하마터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엘리베이터에 탈 뻔했지 뭡니까. 이렇게나 제대로 된 인사를 엘리베이터에서 받을 줄이야. 눈이 동그랗고 맑은 소녀의 인사를 받고서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소녀의 엄마로 보이던 분은 아이의 당돌하고 쾌활한 인사와 저의 놀람에 되려 당황하셨던지 "얘가 왜 이래?"라며 아이를 말리셨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또랑또랑 엄마를 보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인사는 좋은 거야!"
라고요. 맞습니다. 인사는 좋은 거지요. 저는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맞아. 인사는 좋은 거지. 인사해 줘서 고마워. 멋지네!"
꼬마 숙녀의 극적인(?) 등장은 꼭 아니더라도 우리를 웃게 해주는 어린 친구를 볼 때가 종종 있지요.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워주는 아이. 작은 과자를 나눠 먹을 줄 아는 아이. 바르고 고운 말을 쓰는 아이. 감사하다 말하는 아이. 외에도 많은 '바람직한' 아이들이 있고, 이 아이들은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한 명의 어른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아이들이 많은 만큼 전해줄 수 있는 칭찬도 다양하겠지요. 저는 그중에서 이것을 최고로 칩니다. "이 친구, 가정교육 참 잘 받았네!" 너무 클래식한가요?
밥상머리 교육이라고도 하지요? 뭐라 부르든, 언제나 교육의 효과는 바깥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가정 밖에서 가정교육의 정도가 드러나고 밥상 밖에서 밥상머리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죠. 선수의 기량은 훈련장 밖에서 드러나고 학교의 진가는 졸업한 후에야 빛을 보듯 말이죠.
정말이지, 졸업 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보려는 처제를 보며 또 깨닫습니다. 학교의 목적은 탈학교이며, 교육의 목적은 언제나 탈교육이라는 것을요.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은 좋은 내신 성적을 받는 학생을 기르는 게 아닌 좋은 어른을 기르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학교폭력'의 이력이 있는 사회인을 그토록 경계하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간혹 입시를 고등학교의 목적이라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입시가 중요하다 말하는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좋은 사회인'이 되고자 함에 입시가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기에 그리 말하는 것뿐이지, 오로지 입시 내적인 만족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학에 가서도 예상치 못하게 삶이 바뀌는 아이도 있고, 대학과 무관하게 고등학교에서부터 사회인, 직업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아이와 이를 돕는 학교도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중학교의 목적은 좋은 고등학생으로 준비시키는 데 있고, 좋은 초등학교는 중학생이 될 아이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다 할 수 있지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중학교 교과서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비하여 눈에 띄게 한자어나 역사적 의미를 담은 어휘의 양이 증가합니다. 중학교에 적응하기 위한 생활 패턴과 자세도 남달라 지고요.
그러니 잘된 초등학교 시절이라 함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과정 동안 점차 중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때는 반드시 오고, 그때가 되면 아이는 초등학교 7학년이 아닌 중학교 1학년이 되니까요.
급하면 다그치게 되고, 다그치면 당황하게 되고, 당황하면 때를 마주하여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러니 여유를 두고 대비하는 것이 교육의 기본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그치지 않고 여유롭게, 미리 바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학생은 학교의 주인이 아닌 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학생은 반드시 학교를 떠나야 하니까요. 가게를 손님에게 맡기고 떠나는 주인이 어디에 있겠어요. 학교는 무인 편의점도 아닌걸요.
언젠가는 반드시 학교를 떠나갈 학생을, 그들에게 남은 100년 즈음의 학교 밖을 사는 데 최소한이나마 준비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 학교와 선생이 맡은 일의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겪은 학창 시절은 앞으로의 100년을 위한 포석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학교는 쓸모없는 것만 가르치는 곳 아니었어?"
"학교 공부는 입시에만 필요한 거지."
"내 학창 시절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데?"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르셨나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학창 시절은, 배웠던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잔상은 앞으로도 충분히 쓸모 있을 만큼 '꾸준한 학습'에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그것, 우리가 12년간 매일 펼쳤던 그것에는 이미 미래를 대비한 답이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답의 정체를 함께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