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_必記

공부를 위한 최소한의 방법(03)

by 김똑띠

"선생님! 저 필기 노트 잃어버렸었어요!"


필기 노트를 잃어버렸다니.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으레 나타나는 노트 도둑이 또 등장했나 싶었습니다. 매사 꼼꼼하고 성실하며 성적도 아주 뛰어났던 J양이 수업 중에 빼놓지 않고 정리해놓은 것이었으니, 필시 사냥꾼(?)의 눈길을 끌었을 테죠.


그런데 잠깐. 필기 노트를 잃어버렸"었"다니? 아니나 다를까, 시험 기간은 지난주에 이미 끝난 터였습니다. 교무실 자리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선 J양의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J양의 얼굴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수심보다는 도리어 중요한 비밀을 고생 끝에 알아낸 밝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J양은 말하기를, 잃어버린(줄 몰랐던) 과목의 시험 전날 독서실 책상에 꺼내놓았을 때가 되어서야 그중에 노트가 없는 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지러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까워 이번만큼은 눈물을 머금고 없이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죠. 자신의 실수로 챙기지 못했다고 생각한 J양은 그래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적고 정리했던 노트 없이 준비한 시험. J양의 걱정과 달리 시험은 무난히 출제되었고(J양의 체감), 그 시험에서 전교생 중 유일하게 객관식과 서술형 문제 모두 만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트는 시험 기간이 모두 끝난 다음 날 아침 J양 책상 정중앙에 반듯이 놓여 있더랍니다.


J양의 노트를 가져갔던 그 녀석은 과연 만족하여 시험을 치렀을지, 궁금치도 않네요.



집중의 연장


필기는 집중을 연장하고 기억을 강화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체능 과목처럼 실기를 기반으로 하는 공부에서는 현장에서 하기 어렵지요. 그럼에도 배우고 훈련했던 내용을 복기하거나, 작품과 경기를 관찰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는 건 여전히 중요합니다. 손흥민 선수나 김동현 선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류 선수들은 자신만의 훈련 일지와 아이디어 노트가 있다고 하지요.


책이든 수업이든 상관없이 남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때 필기는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노트 정리와 관련해 자주 참고하는 책 《서울대 합격생 100인의 노트 정리법》에 따르면, 서울대 합격생의 75% 이상이 수험생 시절 수업을 들으며 필기를 했다고 합니다. 《도쿄대 합격생 노트 비법》이란 책에도 도쿄대 합격생 대부분은 노트 필기를 했다고 하고요.


필기가 능동적으로 집중을 이어가는 데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지속성 때문입니다. 한 번의 수업(혹은 책을 읽는 시간) 중에 선생은 거의 쉬지 않고 언어를 뱉어냅니다. 칠판에 판서를 하며 글을 쓰고, 판서를 하지 않는 동안엔 행간의 의미를 설명하며 끊임없이 말을 하죠.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란 말처럼 시간은 번개처럼 지나가고 알려줄 것(이라 쓰고 진도라 읽는 것)은 무척 많기 때문이죠.


저는 때때로 아이들의 졸음을 쫓고 주의를 다시 끌어내기 위해서 "쓸모없는" 농담을 하곤 하지만, 유능한 선생은 농담에서 자연스럽게 수업으로 재진입합니다. 그러니 수업에서 오가는 말 중엔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죠. 처음과 끝을 모를 염불처럼 넘실거리는 언어의 파도를 타며 몽롱해지는 정신을 놓치지 않는 방법으로는 필기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필기를 하려면 귀와 눈과 손과 머리가 동시에 부지런해야만 하니까요.



눈, 귀, 손, 머리


필기를 하는 중엔 눈이 멀리 미끄러질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서는 선생의 입과 행동, 칠판에 적히는 판서를 놓치지 않아야 하죠. 고개를 숙여서는 연필 끝과 노트 지면 안쪽으로 시선이 한정됩니다. 마인드 원더링이 일어나는 10분의 시간선을 학생이 지나게 되더라도 선생의 쉬지 않는 말 덕분에(?) 필기는 이어져야만 하니, 눈이 미끄러질 틈이 없습니다.


눈이 선생의 얼굴과 칠판을 떠나 공책을 보며 하는 중에도 귀는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공책에 글자를 적고 도표를 그리는 동안에 혹시 선생의 중요한 말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중구난방으로 낙서하듯 적지 않고, 훗날의 내가 다시 읽고 공부하기 위해선 손도 함부로 놀려선 안 됩니다. 최소한 나란히, 순서에 맞추어 위에서 아래로 가지런히 써야 하죠.


머리는 또 어찌나 바쁜지요. 선생의 말과 판서 속에서 위계를 가려내 대단원, 중단원, 소단원을 구분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중요한 개념과 설명, 예시를 별도로 인식하고 선후 관계를 따져 기록하죠. 여러 개념이 등장할 때는 이것들이 과연 선후 관계에 있는지, 상하 포함 관계인지, 유사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지 등을 따져 구분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투박한 노트의 힘


필기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 이를테면 들여쓰기나 기호 쓰기, 메모지 붙이기나 색깔 구분 등 효과를 높여주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제대로 된 필기는 충분히 바쁩니다. 실제로 수업 중에 메모지를 꺼내고 색 구분을 하느라 펜을 고르는 중에 아까운 집중력이 끊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4


그래서 저는 우선 학생들에게 과목을 가리지 않고 필기를 권하거니와, 첫 필기는 기술 대신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서 작성하도록 지도합니다. 그렇게 초안 작성한 것은 복습을 겸하여 앞서 말한 여러 기술을 적용해 보며 완성본을 만들도록 합니다. 실제로 서울대, 도쿄대 합격생의 노트 중에는 샤프 하나로만 투박하게 정리된 것도 꽤나 많습니다.


공부에는 필기라는 행위가 노트라는 결과보다 더 중요합니다. 서울대, 도쿄대 학생뿐만 아니라 필기를 꾸준히 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필기하며 재미를 느꼈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이러한 재미의 정반대에 있는 공부 트렌드도 있습니다. '필기 노트'를 따로 판매하는 학원 교재들이 많지요.


잘 짜인 노트를 참고함으로써 자신의 필기 습관이나 정리법을 개선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필기는 동사이지 명사가 아닙니다. 필기를 하는 동안에 공부가 되는 것이지 손글씨 예쁘게 적힌 친구의 자료를 얻지 못해 공부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필요한 법입니다.




왜 필기라는 행위가 그토록 중요한지, 다음 글에서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필기의 비밀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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