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패, 나의 두려움

-무서울 게 없었던 나, 결국 마음의 병까지 피어낸 나

by 다혜

8년 동안 사랑을 약속한 남자와 11월 결혼을 앞둔 32살 예비 신부이자, 뇌병변,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의 큰딸이자, 내가 가진 재능으로 꿈을 키워나가는 아이들의 선생님



초등학교 1학년, 나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가수를 장래희망으로 굳은 결심 속에 공부도 안 하고 노래하고 춤추기만 했던 뚝심 강한 여자아이였다.

언젠가는 이렇게 노래하면 꿈이 내 앞에 다가와 있을 줄 알았다.

그때 당시 보아라는 가수가 만 14살로 데뷔한 걸 보고, 나도 14살에는 꼭 데뷔해야지 했지만 13살이 되던 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이 흘러 14살이 되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래, 16살에 데뷔해도 돼" 정말 순수했던 것일까

지금은 그 시절 내가 너무 그립다.


그렇게 흐르고 고등학생이 되고 19살이 되던 때에, 많은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배움도 없었던 아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아빠와 엄마는 나에게 단 한 번도 '하지 마라, 그만둬라, 공부해라' 하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를 믿는 것이었을까, 아님 방목형으로 날 교육하셨던 거일까

지금도 궁금하지만 물어본 적은 없다.


19살이 되고 판단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 됐을 때였다.

엄마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언제나 때가 있다. 계속하다 보면 그때가 올 거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현실에서 19살인 나는 와 닿지 않았다.

부모님한테 미안하고 내 미래가 두렵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오디션을 보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마음을 먹고 마지막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꿈에 그리던 대형 기획사에 합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 인생이 정말 이제 시작이구나 했다.


역시나 세상엔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마지막 남게 되는 기회는 갖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 어떤 환경이 바뀌다 보니,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는 더 뚜렷해지고 자신감도 붙은 게 아닌가

다시 나는 광주로 내려와 열심히 연습하며 실용음악과 진학도 병행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결국 대학 진학은 못했지만 나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작곡가의 노래를 불러 앨범을 발매해주는 오디션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종으로 뽑혀 서울을 올라가게 된다.

이전과는 다르게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부푼 기대를 가지고 매일같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러다 내 이름으로 된 앨범이 발매됐지만, 그대로 묻혀버렸다.

기대를 많이 했던 탓일까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비참했다.


서울생활을 하던 도중 더 이상은 마음이 힘들어 새벽길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표를 끊고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광주 톨게이트를 보자마자 가슴이 너무 울컥거리더니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나 광주 거의 다 왔어 엄마 보고 싶어 이제 안 갈 거야"라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오랜만에 광주 중심지인 충장로에 기분 전환하러 나갔는데,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된다.

그 친구는 나를 보며 "반갑다. 그런데 너 여기 왜 있어? 가수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라고 하는데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광주에 있으면서 친구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대인기피증이라는 게 왔다.

아무도 만나기 싫었고, 그냥 아르바이트나 해서 돈이나 벌어야지 하고 일만 했다.


그리고 어느 새벽, 잠을 자고 있는 데 새벽 5시경 모르는 번호가 자꾸 울려 받지 않았는데 20통이 넘게 전화가 울려 받았더니 누군가가 급한 목소리로 엄마가 쓰러졌다고 했다.

마침 아빠는 진도에 출장 가 있는 상태였고, 집에는 나랑 다음날 학교 가는 동생이었다.


급하게 응급실을 갔지만 엄마가 의식도 잃은 채 있었다.

뇌출혈이라고 한다.

엄마라고 부르는데 의식도 없고 분주한 의사, 간호사를 보는데 너무 무서웠다.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당직이라며 대학병원으로 이송하겠다고 해서 동생과 구급차에 올라타 이동했다.

그런데 대학병원에서는 나에게 보호자냐고 물어봤지만 너무 어리다고 아빠를 부르라고 한다.

그때 나는 21살이었다. 내가 어려서 보호자가 안된다는 말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기지만 아빠한테 연락을 했다.

아빠가 오는 데는 시간이 지체가 되었고, 그사이 엄마는 계속 상태가 악화가 되었다.

그러던 결국 다시 처음 실려갔던 병원에 의사가 왔다고 다시 옮기는 것이다.

황당하다. 엄마는 이동하는 도중 시간을 다 빼앗겨 골든타임을 놓치고 대수술에 들어갔다.

그 후, 엄마는 오른쪽 팔과 다리 편마비와 언어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세상이 끝난 줄만 알았다.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꿈만을 위해서 달려온 나에겐 너무나 큰 짐이었다.

너무 가혹했다.


그래도 또다시 닥친 상황에 극복해나갔다.

재활병원으로 이동했지만 24시간 간병인을 쓰기엔 너무 큰 비용이 들어,

아빠와 나 그리고 동생이 교대로 병원에 2년 가까이 엄마를 간호하며 지냈다.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해야 했던 아빠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사주고 집안 살림까지 맡아야 했던 나와 여동생


내가 할 줄 아는 건 노래하는 것이었다.

간호를 교대로 봐야 되는 시간에 틀에 갇혀 나에겐 조금도 유동적이고 효율적인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작했던 보컬 트레이너.


나는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다시 한번 마음을 잡고 대학 진학을 못한 부족함으로 인해 잘못된 교육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닝에 관한 책과 발성이 고스란히 담긴 CD도 구매하며 모니터링하고 연습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즐거웠고 나는 다시 한번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게 되는 내 상황과 환경에 만족하며 행복했다.

혹은 마주한 현실에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아이들이 꼭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23,24,25 열심히 일하고 엄마 간호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수입도 300이 가까운 돈도 벌게 되었다.

많은 실패가 있으면 성공한다고 하던데 그건 각자의 기준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스스로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28살 반복적인 일상과 내가 플레이어로써 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든 이유였던 것일까

아님 이미 앓고 있었던 건 아녔을까


내가 공황장애라고 한다.

경미한 증상으로 그냥 이겨낼 수 있다고 그 정도는 뭐 충분히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또다시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황장애는 증상이 더 악화가 됐고 인후통으로 병원을 갔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나오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호흡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공황장애 약을 응급히 처방받아먹기 시작했다.

극복할 수 있는 책도 읽어보며 지금 결혼을 약속한 내 옆에 있던 남자 친구의 도움으로 주말에는 근교로 가서 좋은 것도 보고 좋은 것도 먹고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생활을 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2020년 날씨가 따뜻해지고 꽃이 피던 봄

갑자기 꽃을 보는데 눈물이 나고, 맑은 하늘을 보는데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왜 그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도 역시나 그 녀석이 다시 올까 봐 너무 두렵다.

무섭다.



나는 이 긴 글을 써 내려가며 과거를 회상했다.

쉴틈이 없이 달려오느라 내 마음 한번 꺼내볼 시간이 없었다.


나의 꿈을 못 이룬 것, 엄마가 아팠던 것,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던 것 등등..

그것에 대한 실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를 지키는 것을 실패했다.

내 마음이 아프게 방치한 것..

결국 병을 내가 피어내었구나..


다시 나는 마지막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두렵다.

결혼을 하고 나와 닮은 아이를 가지게 될까봐..


나를 돌아봐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