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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Jun 11. 2023

영남알프스의 보물

명헌(만정헌)

많은 분들이 등산강사는 산에서 길을 안 잃을 거라고 생각하십니다만, 혼자 산행을 할 때 '세 분 할머니들'한테 길을 가르쳐드리거나 '하얀 소복을 입은 묘령의 여인'을 따라가다 보면 벌건 대낮에도 길을 잃기 쉽상입니다.


2~3년쯤 전의 어느 날엔가도 배내봉 지나 밝얼산으로 하산을 하던 중 방향감각을 잃어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은 간월산 저승골 쪽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발길은 전혀 반대방향으로 내딛고 있었습니다.

지하실에서도 동서남북을 구분해 내는 인간 나침반인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했었던 것인지 한참을 내려오다 깨달았고, 발길을 돌리기에는 늦어버렸지요.

오산못이라는 낯선 저수지에 내려 등억을 향해 한참을 걸었습니다. 띄엄띄엄 영남알프스 둘레길이라고 쓰여 있는 낡은 안내판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요.

인적조차 드문 시골길을 한참 터덜터덜 걷다가,

'명촌마을'이라는 곳에서 무려 540년을 거슬러 제게는 기적 같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만정헌(晩定軒)>
'뒤늦게 이제야 정착할 곳을 찾아 지은 집’


터를 고르고 잡으신 이의 실로 깊은 고뇌가 느껴졌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다가 다소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양반집들이 사각의 기둥을 사용하는데 이곳은 궁궐이나 사찰처럼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당대의 세도를 드러낸 것이거나 둥글게 사시려는 주인장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여느 대가들의 고택처럼 사방 모서리의 주춧돌에는 한국 토종귀신인 "구석귀신"들의 놀이터인 작은 홈도 뚫려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싸리나무'라고 합니다.

"오~잉, 싸리 빗자루?? 싸리나무로 어떻게 기둥을 만들 수 있을까?" 금세 허접한 궁금증이 발동합니다.


붓다가 열반한 이후 사리 운반용 함을 튼튼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느티나무나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사리를 담은 나무라서 싸리나무"라 불렀다고 합니다. 실제로 만정헌의 싸리나무는 지역식물학자에 따르면 느티나무라고 합니다. 게다가 밑둥이 하얗게 변한 것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백반과 소금을 사용해서 방부처리를 한 것인데, 소나무 재질은 잘 스며들어 하얀색이 덜하고, 느티나무는 눈에 띄게 하얗게 남는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요. 아무리 마당쇠가 힘이 쎈들 저 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지는 못했겠지요.^^;;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뒤편에는 1m 50cm 정도의 굴뚝이 있습니다. 담장 높이나 지붕보다 낮습니다. 굴뚝의 연기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낮음은 동네 사람들에게 겸손함을 보이고 자기를 과시하지 않으려는 바램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끼니를 거르는데 자기들이 밥짓는 연기를  보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심이었던게죠.

또한 18대 종손이시라는 관리인의 말씀에 따르면 "낮게 오르는 연기가 처마 끝을 휘감아 나가므로 해충박멸의 과학적인 지혜도 담겨 있다"라고 하십니다.


대개 양반 기와집은 장작을 사용해서 굴뚝이 낮습니다. 초가집은 나무 삭정이나 검불을 주로 때기 때문에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올라 불이 날 수 있기에 지붕보다 높고, 돌로 쌓은 경우에는 집에서 떨어져 세운다고 하네요. 건축학적인 지식이 빈약하니 심오한 뜻을 일일이 알지는 못하나, 모든 것은 체험적 지식을 통한 이유가 있겠지요.

9대 손 께서 임진왜란으로 반파된 건물을 중수하시며 '만정헌'을 버리고 <명헌>이라 새로 편액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료에는 '만정헌'이지만 살고 계신 후손께서는 새로 명명한 <명헌>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하시는군요. 수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를 배출한 대단한 명당올습니다.

'명촌(鳴村)'이라는 마을이름도, 봄이면 새들이 하도 지저귀는 바람에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파종한 씨앗을 파먹기 위해, 봄 꽃에 몰리는 벌들을 잡기 위해 몰려든 새들이 떼창을 했다는 것이니 참으로 풍족한 땅이었나 봅니다.

처음 상량을 하고 어언 544년, 집은 사람이 살기에 존재한다고 하지요. 낯선 이의 방문에 달려와 불쑥 배부터  내보이던 똥깡이 녀석이 이곳 쥔장들의 성품을 짐작케 합니다.


하세월의 세력에 중수를 거듭했지만 여전히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같은 목조가옥, '명헌(만정헌)'.

마침 근처 출장길이 있어서, 산에서 길을 잃었던 아스라한 추억을 더듬어 들러보고 소개드립니다. 우연히 언양 상북면을 지나시는 길이면 눈에 담아보시는 것도 추천드리고요...


네비: 만정헌

울산 울주군 상북면 명촌 1길 39

울산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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