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이 좋아 김포로 이사온 지 벌써 20년째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요즘 한창 평화도시 로드맵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접경지역이라는 지역의 정체성도 있겠지만 조강이 품은 서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역의 평화 담론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조국분단의 상징인 조강까지 생각해보니 평화를 품은 도시, 김포가 더 궁금해진다. 20년만에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궁금해서 나선 '김포 기행 길' 그 처음은 <접경지역, 김포문화이야기> 탐방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어렵던 시기 평화의 봄처럼 따뜻한 가슴을 내어주었을
민초들의 울타리, 김포성당과 강화성당
김포 북변동에서 제일 높은 곳에 김포성당이 있다. 큰 길에서 올라가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아 일부러 찾는 길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릴 만한 곳에 입구가 보였다. 한국전쟁 전후 석조교회건축의 특성을 대표한다거나 110년이 넘은 신앙공동체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지닌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말은 그냥 흘려들었다. 대신 전후 어렵던 시절에 열두 칸 초가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민초들이 꼬박 1년 동안 곡괭이로 땅을 파고 돌을 날라 지었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콕 박혔다. 어떤 종교이든 그것은 그 시대, 그곳에서 살아가던 민초들이 힘든 순간에도 다시 주체성을 회복하도록 한 무형의 문화다.
문득 건축양식과 종교적인 배경 자체보다도 그 건축물을 쌓아 올리며 기도했을 수 많은 민초들의 바람이 궁금해져서 높은 종탑을 올려다 봤다. 윤흥길의 ‘종탑 아래에서’ 작품 속의 명은이가 떠올랐다. 전쟁의 폭력성과 참혹함을 고발하는 도구로써,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장치로써 충분했을 그것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김포성당 역시 어렵던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봄처럼 따뜻한 가슴을 내어주었을 터. 성당 뒤편 소나무숲에는 총 15처의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묵상을 하도록 만들어진 이곳은 예전에도 민초들의 안식처였듯 현재도 낯선 방문객에게조차 딱딱하고 건조한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종교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권위적으로 여겨졌던 높은 종탑도 새로웠고, 종교의 문턱을 떠나 성당, 교회, 사찰 공간이 주는 의미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120년의 역사를 가진 성공회 강화성당 역시 가난과 핍박으로 삶이 고단했던 이들에게 안식처였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강화성당은 언뜻 보기에 단청을 한 것이 불교사찰인 것처럼 보였다. 1900년에 지어진 성당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등 기존의 성당 구조와는 많이 다르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서 섞이고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강화성당은 비숫한 시기 교회나 성당의 모습과도 다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려고 한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성 마루에 높게 자리 잡은 터는 배 모양으로 구원의 방주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 했고, 권위를 상징하는 둥근 기둥 대신 민가에서나 쓰는 네모기둥을 쓴 것 등이 당시 민초들의 정서를 배려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修己 洗心 去惡 作善(수기 세심 거악 작선)’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세례대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를 수양하고 마음을 닦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라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도 서양 종교가 한국에 토착화된 면모가 느껴졌다.
그날 운 좋게도 성당 관계자로부터 강화성당에 관한 이야기들을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목재는 백 년 이상된 적송을 신의주에서 구해다가 뗏목으로 운반한 것이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도편수가 건축을 맡았다는 것, 그리고 성당 내부와 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공간감을 감안해서 넓은 마당을 확보하거나 시야를 넓히던 조선시대 건축문화를 생각해 볼 때 강화성당은 약간 답답함이 느껴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신도가 함부로 올라설 수 없는 제단”이라는 설명도 높은 종교적 권위를 보여주는 듯해서 약간 무거움이 느껴졌다.
강화성당 홍보물에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중용의 정신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협의체적 성격”, “사회정의 실천 운동뿐만 아니라 종파, 종교를 뛰어 넘는 대화 또한 가능하도록”해 주는 실천적인 종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문구가 있었다.
부디 이 땅의 모든 종교가 탑 위에 탑을 쌓는 일에 힘쓰기보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문턱을 낮추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더 힘쓰길.
조강은 한민족의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하고,
접경지역이라는 지역의 정체성과도 이어져 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면 사방이 탁 트인 언덕을 올라 월곶돈대와 연미정이 있다. 1995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물길의 하나가 서해로 흐르고, 다른 물길이 갑곶의 앞을 흘러 인천쪽으로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렸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때는 인재를 가르치던 곳이기도 하고, 사신을 영접하거나 국정을 논의하고 협약을 체결하던 곳이고,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가 2008년부터는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지만 이날의 연미정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더구나 연미정 좌우로 있던 두 그루의 느티나무 중에 한 그루가 지난 태풍 '링링'으로 쓰러져 밑둥만 남은 채로 있어서 더 안타까웠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품은 채 주민들에게는 뜨거운 여름 그늘이 되어주었고, 단옷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네를 매고 놀던 생명력 있는 쉼터였다는데...
‘고요한 아침과 해지는 풍경이 심장을 멈춰 서게 한다’는 연미정에 오르니 북으로는 개풍군과 파주시가 보이고, 동으로는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으로는 염하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조강을 통하여 서해로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강 일대는 전쟁으로 물길이 막히기 전까지는 100여 호가 밀집해 살았고, 관영숙박업소가 있을 정도로 한강 하구의 수운과 물류의 중심지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발길들이 거쳐 갔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 조강이 서쪽으로 흘러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우도가 보인다. 1996년 장마 때 북쪽으로부터 소 두 마리가 이곳으로 떠내려왔는데 그곳에서 소 두 마리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상징하듯 한 마리는 사라지고 또 다른 ‘소만 구출되어 ‘평화의 소’, ‘통일소’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연미정에 올라 바라본 북쪽 개풍군은 손 닿을 듯 지척이다. 가까운 곳은 물폭이 불과 1.7km 밖에 되질 않는다. 그 누구의 통제 없이 저곳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그 날을 상상하며 뭉클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
그곳에 서서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평화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강 건너 개풍군과 현재 김포시의 접경지역으로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맥락으로 지역의 서사를 구성할 수 있을지. 예컨대 북녘땅을 바라보며 상흔을 떠올려 보거나 전쟁으로부터의 안보를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다양한 형태의 제한, 억압, 폭력들을 성찰해 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상상력과 역량을 키워나가는 촉진자로서의 역할이기도 하다.
올해 김포시는 평화문화도시 조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구상중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관광자원화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다. 김포시는 접경지역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다양한 이주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도시이고 여전히 산과 논밭이 시선을 끄는 곳이다. 한때 가장 번화하던 북변동은 재개발로 시끄럽지만 그곳에는 역사와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무엇을 복원하고, 무엇을 회복해야 할지 고민하는 평화문화도시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