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변동 옛거리 - 승가대학 - 향교와 서원 - 통진이청-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두 번째 김포문화 기행은 한때 김포의 중심지였던 북변동 일대를 돌아 보는 것을 시작으로 향교와 서원, 그리고 조선시대 통진현 관아의 일부인 통진이청을 둘러보는 거였다. ‘접경지역 김포문화이야기’에서는 여러 차례 ‘무엇을 살리고 복원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구 7만여 명의 농업 중심 중소도시였던 김포는 40년이 지난 현재 46만여 명을 넘어섰고, 김포 시민의 80% 이상이 타 지역이나 외국에서 온 이주민으로 구성되었다.
무엇을 살리고 회복할 것인가
북변동 거리는 과거 군청, 경찰서, 세무서 등이 있었고, 시외버스터미널과 재래시장이 있는 김포의 명동이었다. 옛날에는 향교가 있던 자리는 대부분 고을의 중심부였다고 한다. 천 년의 김포향교가 있고, 백 년이 넘은 김포초등학교, 제일교회, 김포성당 등 김포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이 북변동이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 북변동을 검색하면 ‘김포의 슬럼화 지역’이라는 문구가 간혹 눈에 띤다.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관공서들이 다 빠져나간 북변동 거리는 재개발을 목전에 두고 서로의 이해가 달라 시끄럽다.
무엇을 살리고 복원할 것인가라는 화두는 이미 던져졌다. 누군가에겐 재개발이 생존 투쟁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의 공동체 문화에 새로운 문화가 진입했을 때 갈등은 당연하다. 다만 경제적 논리로 북변동 거리가 가지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폄하되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로서의 북변동 거리,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문화적 다양성이 살아 숨쉬는 거리를 만들어 가야 하는 시점이다.
잠시 숨을 멈춘 듯 고요하던 북변동이 다시 살아 숨쉬고 있다. 북변동 도시재생을 꿈꾸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북변동 마을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 사회적기업 어웨이크는 '북변동 백년의 거리' 프로젝트를 통해 '북변동만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을 찾아 새롭게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공감과 소통의 축제, 우체국을 재탄생시킨 '2019 북변363예술광장' 프로젝트, 북변동 다른이름 저장 프로젝트 ’북다저‘ 등 회복적 관점의 활동 소식들이 반갑다.
북변동에서 조금 떨어진 금정산 아래에는 중앙승가대학이 있다. “한번 스쳐 가는 인연도 소중하다.”는 비구니 스님의 첫인사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승가대학은 대한불교 조계종 스님들의 4년제 교육기관이기도 하고 사찰이기도 하다. 예비 스님들은 이곳에서 4년 동안 기숙하면서 수련 후 비구, 비구니 스님으로 출가하게 된다고 한다.
승가대학에서 세계의 대장경과 보물 제1225호인 묘법연화경을 보게 됐는데 종교를 떠나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부처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는 법화경을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법화경은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라고 한다. 세계의 대장경을 볼 수 있었던 기회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팔리어 삼장, 한역 대장경, 티베트 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을 함께 볼 수 있었다. 특히 일반 서민도 읽을 수 있도록 아주 쉬운 한글로 번역해 놓았다는 북한 대장경과 귀족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대신 서민의 속어인 팔리어로 된 대장경 이야기는 반가웠다. 부처님도 실제 설법을 할 때 서민의 언어인 팔리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서로가 덜고 채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꿈꾸다
김포에는 조선시대 지방의 두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이 세 곳이나 있다. 먼저 북변동에 있는 김포향교와 우저서원을 찾았다. 국가에서 운영했던 관학 교육기관인 김포향교와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우저사원은 쉽게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면이 많았다.
김포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공립교육기관이다. 김포향교는 고려 인종5년(1127)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고,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 등 5성과 송조 2현, 그리고 동무, 서무에는 우리나라 명현 18위가 봉향되어 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고, 향교로 들러가는 외삼문,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그리고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동무와 서무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가 공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학교의 성격을 가진 교육기관이었다. 서원은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지은 교육기관이다. 초기 서원은 당시 사람들의 참다운 공부를 위한 환경조성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사림들의 향촌활동의 기반이 됐던 곳이다.
조선 말기 세도정권의 세력기반이 된 서원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관으로 변질 되고 지방의 정치권력이 강해지자 대원군이 서원의 폐해가 지나치다며 전국의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고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겼다고 한다. 이때 남은 서원 중의 하나가 우저서원이다. 우저서원 내에는 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고,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이 있어서 조선 후기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저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인조 26년(1648)에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라는 것은 국가가 공인하는 교육기관을 의미하는데, 우저서원은 숙종 1년(1675)에 우저(牛渚)라는 이름을 사액 받았다고 한다.
우저서원 대성전은 중봉의 시호 ‘문열’을 따서 문열사(文烈祠)라고 하고, 중봉의 위패를 모셨다. 당시 서원을 설립하려면 유림에서 인정할 만한 성현을 모셔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한 인물이 여러 곳의 서원에 봉향되는 첩설 현상도 나타났다. 퇴계 이황의 경우는 전국 31개소의 서원에 첩설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역의 학자인 중봉선생의 생가에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의 의미가 남달라 보였다.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 때 충청도 옥천과 금산에서 의병을 이끌던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서인의 핵심정치가였던 그는 관직에 나가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여러 차례의 상소를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 사신에 관한 상소를 올릴 때는 지부상소(도끼를 짊어지고 상소를 올린다는 뜻)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박제가는 이런 중봉 조헌의 삶을 「북학의」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후세에 살고 있지만 그분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다.”고 표현했다.
‘향교, 서원 문화재 활용이 최대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최근 지자체마다 향교와 서원을 지역사회의 문화 향유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대표 문화재 활용 자원으로 육성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김포에서도 우저서원에서 해마다 열리는 중봉문화제 문화공연과 고유제, 우저서원 전통문화 체험 교실, 향교 문화재지킴이 활동 등 다양한 지역문화활성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일회적인 행사, 사업으로 끝나지 않고 지역공동체를 살리고, 통합의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만 지역문화예술을 고민하는 활동가들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는 일. 눈으로 확인 가능한 실적을 계산하는 행정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요원한 일이다.
서원 강당의 현판 이택당(麗澤堂)은 ‘두 연못이 이어져 있으면 서로 물을 대주어 어느 한 쪽만 마르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붕우는 늘 서로 절차탁마하여 상대에게 자극과 각성을 주어 함께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배움의 공동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서로가 덜고 채우는 관계 말이다. 옛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에 잠시 들러 이런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김포에는 또 하나의 교육기관이던 통진향교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통진향교가 현의 북쪽 1리 지점에 있다고 했으며, 안내문을 통해 통진향교가 고려 인종 때 세워져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며 개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통진향교는 경기도내 향교 건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는 하나 구조와 기능 면에서는 여느 향교와 거의 비슷했다.
김포는 조선시대 때 통진현과 김포현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을 정도로 통진 역시 옛날에는 큰 행정구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에 통진도호부가 김포군으로 병합됐다.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문수산 아래 ‘통진’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통진은 지금의 김포시 월곶면 일대를 말한다. 옛 통진현의 관아가 있었던 곳은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다. 통진현의 관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원형이 많이 훼손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건 통진이청이다. 통진이청은 이방들이 업무를 보던 ‘이방청’으로 3.1 운동 당시 일제의 주재소로 쓰였고, 독립운동을 했던 조선인들을 고문했던 장소라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통진향교와 이청에서 조금 떨어진 애기봉 전망대로 가는 길에는 우리나라의 차를 언급한 문헌, 다부(茶賦)를 쓴 한재 이목 선생의 위패를 모신 한재당이 있다. 그리고 월곶리에는 지역주민들이 중심이 돼서 지역문화공동체 활동을 건강하게 풀어가고 있는 노나메기와 월곶쌀롱이라는 단체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마을길을 구성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과거의 역사문화가 과거로서만 끝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살아 있는 연결고리가 되도록 하는 일,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지역 활동가들의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