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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하 Jan 07. 2023

우리의 환호와 우리의 외면

경인일보 수요광장 


뮤지컬 킹키부츠를 보는 동안 그녀를 생각했다. 드랙퀸의 화려한 공연은 신났고 함께 관람하는 많은 이들은 환호했다. 80㎝의 부츠를 신은 여장 남자는 1890년대 영국의 노스햄튼이라는 보수적 시공간에도 불구하고 배제되거나 추방되지 않았다. 그를 거부하던 이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 직접적이거나 미묘한 눈빛을 성찰할 수 있었고, 그들의 성찰로 그는 '있는 그대로' 온전한 '사람'이 됐다. 드라마 속 드랙퀸 롤라는 그렇게 살았으나 드라마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세계 속 그녀는 죽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열광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현실 속 그녀는 살지 못했다. 무대의 드랙퀸을 향한 열광이 그녀에게 닿기에 현실 속 그녀는 덜 화려했고 그녀를 대하는 관계는 더 관습적이었다.


발달장애인의 죽음 또한 줄을 이었다. 쏟아져 내린 비를 피하지 못했거나 갑작스런 불길을 피하지 못해 죽기도 했고, 막다른 길에 몰려 더 이상 보살필 수 없던 가족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언론은 국가의 부재를 통탄했고, 소식을 접한 이들은 비극적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으며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다. 먼 소식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그렇게 당연했으나, 지하철 플랫폼에서 만난 눈 앞의 장애는 당연한 일상의 삶과는 달라 거추장스러웠고 그래서 당연하지 못했다. 양쪽 눈동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창백한 그녀가 바쁘게 오가는 플랫폼 한 편에 그림처럼 정박한 채 내미는 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고, 이동권 보장을 외치는 장애인 단체의 시위는 불편함 없던 이동을 불편하게 만든 상식없는 행동일 뿐이었다. 


폭우나 보살핌 한계 느낀 가족 의해
발달장애인 안타까운 죽음 줄이어


성장과 자본의 세계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말하던 정당 또한 별난 당원을 견디지 못했다. 당장의 보지 않을 자유는 함께 하는 연대란 추상적 지향보다 더 힘이 셌다. 관념은 쉽게 지향이 되어 글이 되고 말이 될 수 있었으나 삶은 쉽게 부딪히고 들끓어서 지향을 향하기 어려웠다. 평범치 못했던 그는 합당하다고 판단된 논리들을 이유로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예상되는 말의 공간은 오늘도 예상 가능한 정의로운 말들로 매끄럽게 채워졌으나, 별나서 낯선 그는 더 이상 그들 옆에 설 수 없었다. 이질과의 공존을 이야기하던 정당은 결국 익숙한 균질을 선택했다.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기 쉬운 일상에선 손실과 이익 중 손실 가능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수여서 당연하게 취득한 기득권은 소수자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보존된다. 소수자가 되찾은 이익이 마치 자신의 손실처럼 느끼는 이유다. 이러한 전망이론 안에선 성소수자, 장애인, 혹은 다양한 독특성을 지닌 이들에게 관대하고 평등한 사회가, '그렇지 않음'으로 다수의 기득권이 된 이들의 특권 혹은 익숙함을 훼손하는 손실로 인식된다. 또한 세상이 공정해야 계획한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가설에선 부정의한 상황에서도 공정하다는 믿음을 파기하기 어렵다. 대신 '피해자'를 탓해 일상의 질서를 유지해야 자신의 삶을 흔들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 장애인의 불합리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런 삶을 바꿔보자는 시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척점에 서는가란 질문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이동권 보장 외치는 전장연의 시위
비난은 온전히 그들에게만 돌아가
머뭇거림의 감정 서로를 살릴수도


2021년 2월24일 트랜스젠더인 김기홍은 스스로 죽었고, 그 해 5월 4일 녹색당 온라인관리위원회는 지나치게 빈번하고 불편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당원의 글을 삭제하고 한달간 이용정지했다. 지난 2022년 3월 수원에선 8살 다운증후군을 겪는 아들을, 시흥에선 중증 발달장애가 있는 20대 딸을 엄마가 살해했다. 8월엔 서울 역촌동 빌라 화재로 대피하지 못한 시각 장애인과 집중호우로 반지하 집이 침수돼 이동이 어려웠던 발달장애인이 연이어 사망했다.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의 죽음은 애도됐지만 이동권 보장을 외치는 전장연 시위에 대한 비난은 온전히 그들에게만 돌아갔다.

한편으론 열광하고 비애로워하고 분노하면서도 바로 그 대상과 나란히 설 수는 없는 일상의 극렬한 온도차를 이해할 길이 없었다. 확실하고 명확한 감정들의 세계에서 머뭇거림은 어쩌면 서로를 살리는 길일지 모른다.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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