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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들

효도가 생각보다 쉬운 거였다


이제는 따로 산지가 10년이 훨씬 넘어서 그전 같지는 않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좋다(좋았다고 표현을 해야 하나?) 일단 아버지가 권위주의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고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어서 그런가 해달라는 것은 정말 무리한 것 아니면 웬만한 것은 다 해주곤 했다. 어릴 적 '슈퍼패미콤'에서 일본 게임 회사인 캡콤사의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나오는 날(기억에 6월 10일인데 맞나 모르겠다) 아버지 혼자 가서 용산을 뛰어다니며 구해오셨다.


※ 심지어 검색해보니 맞다...(1992년 6월 10일)


https://namu.wiki/w/%EC% 8A% A4% ED% 8A% B8% EB% A6% AC% ED% 8A% B8%20% ED% 8C% 8C% EC% 9D% B4% ED%84% B0%202/%EC% 8A%88% ED% 8D% BC%20% ED% 8C% A8% EB% AF% B8% EC% BB% B4


당시에는 보따리 상이 일본에서 가져오는 것 밖에 없었을 텐데 당일 거금 10만 원인가를 들여서 구매를 해서 가져왔었다. 사실 내가 게임을 좋아했던 것인지 게임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게임은 하루에 1시간 이상은 하지 않은 아주 '착한' 어린이긴 했다.


심지어 지금도 아버지에게 반말을 한다.

어른들이 보면 정말 큰일 날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 자라서 그런가 어릴 적에 다른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제대로 못했었는데 그때 친구 역할을 톡톡히 해 주셨던 것 같다. 항상 감사하고 있고 그것은 나의 아이들에게도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다만 웃긴 건 애들한테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들 나에게 존댓말을 쓴다. 그렇고 있는데 하지 말라고 하기도 좀 애매해서 내버려둔다^^;;)




공부는 그럭저럭 했지만 대학교를 엄청 좋은 데를 가지는 못했다.

그냥저냥 남들 하는 수준만큼 공부를 했고 대학교도 서울에 있는 대학 간신히 턱걸이해서 들어간 것 같다. 당시 수능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져서 '재수는 기본 삼수는 옵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수능 끝나고 들어가는 날 괜히 울컥해서 울면서 들어갔었는데 아버지랑 조용히 집 앞에 있던 대학교 운동장에 나갔었다. 책 다~ 들고 말이다.


"이건 왜 들고 나오라고 했어?"

"응, 다 태울라고"

"이걸 왜 태워? 나중에 또 쓸지 모르잖아?"

"뭘 써, 공부 이만큼 했음 됐다. 이제 다른 거 해라"


드럼통 안에다가 넣고 책을 활활 태웠다.

황당했다. 수능 성적은 나오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일단 망한 느낌이어서 울면서 들어갔더니 책을 태워버렸네... 후일담이지만 어차피 한 번 해봤으면 됐고 1년을 더 소비해서 뭘 성공할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명했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대학교 다니면서 군대 다녀오기 전까지는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20여 년이 넘게 지났다.

그 사이에 나에게도 자녀가 생겼고 나의 아버지는 이제 할어버지로 불리는 게 당연한 나이가 되었으며 어느덧 은퇴를 한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셨다. 누구나 그렇듯 같이 살 때는 보이지 않던 많은 단점들이 이제는 뚜렷이 보인다. 이런 것이 세대차라고 할까? 어릴 적 그 자유로운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는데 이제는 그 자유로움 때문에 뭔가 세상과 담을 쌓는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몸도 가끔 아프셔서 예전과 같이 활기차게 뭔가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말이다. 그걸 들으면서 항상 '예전엔 안 그러셨는데...'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 역시도 우리 자녀가 나에게서 독립을 하고 나를 바라볼 때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전화 통화는 주로 어머니와 하는데 아버지가 전화가 오면 가끔 새롭다.


"아들아,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는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아들아, 앞으로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아진다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집은 어떻게 될 거 같냐?"

"아들아, 너네 회사는 괜찮지?"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 태극기 들고 뛰어나가시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의하는 게 있다. 그래도 대화를 하면 재밌고 즐겁다. 뭐 결과가 어떻든 대화가 오고 간다는 것은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겸사겸사 내가 다니는 회사 걱정은 왜 하시는지...(국내 1위... 회사인데...)




효도란 무엇일까?

어릴 적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크면 진짜 효도 많이 해야지'


근데, 뭐가 효도지? 나이가 40이 넘어가는데도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단순히 1+1=2라고 세상을 배워왔는데 너무나 다른 결과와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하지만(물론 이건 우리 어머니가 항상 효도라고 말씀을 하시긴 한다) 돈이 훨씬 많다고 해서 인생을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사실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가족이기 때문에 같이 살면 효도가 될까?


"야, 난 죽을 때까지 너랑 같이 사는 건 싫다. 집에서는 내 맘대로 살아야 하는데 며느리나 손주 눈치 보기 싫다."


아, 역시 자유로운 영혼이야... 심지어 집에 오셔도 2시간 컷으로 돌아가시는 분이니... 말 다했다.

이런 것이 효도가 아니라고 하면 대체 어떤 게 효도가 될까? 생각을 하다가... 답답하니 그냥 물어봤다.


"아부진 어떤 효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효도?"

"응."

"지금 하고 있네."

"뭘??"

"그냥 오손도손 잘 사는 거."

"아..."


아, 생각보다 효도는 쉽다.

그런데 주변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있는 것을 보면 쉬우면서도 난이도는 점점 올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효도 열심히 해야겠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그거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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