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락천사>를 위한 변호 (1)

들어가며

by 이저




지난 봄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리마스터링되어 잇따라 재개봉되었다. 영화는 극장뿐만 아니라 OTT서비스를 통해서도 공개 되었고, 유명했던 90년대 홍콩영화의 향수는 입소문을 타고 새로운 세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향유하는 세대가 변화했지만 영화는 여전히 인기였고 이제는 또 다른 ‘뉴트로’의 선상에까지 놓이고 있는 듯하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스테디셀러'가 되어버렸다.



아마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화양연화>와 <중경삼림>을 고를 것이다.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쉽사리 만들어지지 않는 미장센과 세련된 연출, 모호한 서사의 정수가 두 영화에 가장 잘 드러나 있는 탓이다. 그러나 <화양연화>나 <중경삼림>이 지대한 호평을 받는 것에 비해 <타락천사>는 다소 대중들의 극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화는 <중경삼림>의 3번째 이야기로 구상되었으나, 앞선 두 이야기가 장편의 길이를 충족하면서 <타락천사>는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탄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계획된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살이 붙었고, 연출 의도도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중경삼림>을 낮의 이야기로, <타락천사>를 밤의 이야기로 보기도 한다. 확실한 건 (로맨스의 농도 차 때문일수도 있지만) <타락천사>의 인기가 <중경삼림>에 비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두 영화의 의도적인 연관성으로 인해 항상 맞물려 해석될 수 밖에 없고 감독 역시 영화 내에서 연결고리들을 분명히 드러내고는 있으나, 아직도 <타락천사>는 <중경삼림>의 서브 영화 정도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한편 영화 미학은 영화의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여기에 왕가위의 영화들도 빼놓을 수 없는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듯한 그의 영화에는 그만큼 온갖 구성 요소가 스크린 전체에 비밀스럽게 채워져 있다. 때문에 왕가위의 영화는 홍콩의 지역성, 시대성과 결합되거나 영화 내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락천사>도 기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관객들은 영화 안에서 적극적으로 비밀들을 탐색해 내려 했고, 서사의 느슨함과 근거가 부족한 단편적인 캐릭터들은 영화의 해독가능성을 낮춤으로써 재미를 반감시켰다. 비교하자면 개연성을 갖춘 서사를 지닌 작품들이 그 쾌감를 적절히 채워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평가는 이 영화가 왕가위적 탐미주의 경향을 잃지 않은 ‘보기’에 매우 멋진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가위가 만들어낸 밤의 이미지를 한번 변호해보고 싶었다.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작품을 수용하기를 원하는 수용 미학의 차원에서, 왕가위의 영화는 감각적 효과가 극대화된 또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이때 현상학[1]은 이러한 영화 텍스트를, 즉 지각되는 이미지들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활용될 수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볼 수 있지만(감각), 동시에 바라보고 읽어낼 수 있다(지각).



밤이 내려 앉은 홍콩에서 그들은 무엇으로 인해 흔들렸고, 살아가는가? 말을 잃고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계속 세계-타자-나와 같은 현상학적 물음을 던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에로-존재인 <타락천사> 속의 인물들, 그리고 우리들을 바라본다.








[1] ‘사태 그 자체에로’를 모토로 시작된 후설의 현상학은 근대의 데카르트적인 주지주의와 과학을 기반으로 한 경험주의적 전통의 위기를 비판하면서 개진되었다. 메를로-퐁티도 이 흐름을 계승하면서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자신의 현상학 이론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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