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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Jun 28. 2021

냉면이 여름을 구한다


영하 10도로 떨어진 날, 롱 패딩과 목도리로 완전 무장을 하고 출근길에 카페로 들어간다. 오늘은 월요일이기 때문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맞으시죠?"


역시 이한치한 아닌가? 어차피 회사로 돌아가면 히터를 종일 틀어둘 테고, 그러면 마음과 몸이 당연히 답답해질 것이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을 하는 내 모습을 본 40대 과장님은 "역시 젊어."라고 참 재미없게 인사를 건넨다. "원래 커피는 얼죽아예요." 아직 서른도 안 되었지만 난 40대가 되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겠노라고 굳게 다짐하며 대답했다.


나와 가까운 고독한 미식가의 발언으로는,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진짜라고 한다. 메밀 겨울이 가장 맛있을 때라고. 그는 겨울 냉면의 면은 여름 냉면의 면과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나는 평양냉면을 맛보고 싶다던 친구를 데리고 체감온도 영하 30도인 날에 을지로로 갔다. 평양냉면이 처음인 친구는 먹는 내내 이게 무슨 맛인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고독한 미식가의 말처럼 정말 여름 냉면보다 겨울 냉면이 깊은 맛이 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잘 모르겠다'였지만, 다음날 나는 고독한 미식가에게 가서 맛을 아주 잘 아는 척을 하며 겨울 냉면의 육수와 메밀의 쫄깃함이 일품이었다고 말했다. 그 겨울은 그렇게, 먹을 줄 아는 성숙한 40대의 모습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여름이 왔다.


여름엔 수박과 복숭아를 원 없이 먹는 나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제철 음식을 먹고 싶었다. 나의 동거인은 여름에 사람들이 자주 사 먹는다는 초당 옥수수를 10개 주문했다. 원래 옥수수를 즐기지 않는 우리는 초당옥수수가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옥수수를 깠다. 이게 무슨 맛일까? 옥수수같이 생겼는데, 식감은 아삭하고 과일 같은 느낌. 우리는 생애 첫 초당옥수수를 먹으며 차라리 우리가 함께 즐겨먹는 과일을 사 먹겠다며 웃었다.


여름이 되자 또 다른 친구들이 내가 뽑은 평양냉면 명예의 전당 우래옥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곳에선 평양냉면을 먹어 봤는데 우래옥에 가 보고 싶다고. 평양냉면 먹고 싶으면 당장 우래옥에 달려가는 나는 앞장서 친구들을 우래옥으로 데려갔다. 타이타닉을 연상시키는 2층을 향한 계단, 그리고 웨이팅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무던하면서도 독특하게 부르는 지배인 아저씨ㅡ사실 직함은 모르겠지만 정장 차림의 매니저 같은 모습을 보며 내가 정한 닉네임이다ㅡ, 20대부터 70대까지 아우르는 정통 맛집의 모습. 이것이 바로 우래옥이다.


1시에 도착한 우리는 약 50분의 기다림 끝에 2층에 있는 6인석에 자리 잡았다. 코로나 때문에 세 명이서 6인석에도 앉아 보네,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평양냉면을 기다렸다. 평양냉면이 나오자 무심히, 그리고 넉넉하게 올라가 있는 달달한 배가 나를 반긴다. 면을 풀지 않은 채 육수를 한 입 먹자 더웠던 50분의 기다림을 잊게 되었다. 우래옥에 처음 방문한 친구들은 육수를 한 숟가락도 남기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나는 천천히 이 여름의 냉면을 맛보았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나지만, 냉면만큼은 여름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나는 아직 겨울의 메밀 맛을 모르는 걸 당당하게 인정하기로 한다. 나에게 여름 제철음식이란 냉면이다. 기다릴 때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도 먹고 나면 등골이 시원해지는 냉면. 여름의 냉면을 즐길 수 있을 때 열심히 즐기기로 한다. 냉면이 나의 여름을 지켜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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