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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Oct 18. 2024

우리가 하루를 보내는 법

우리 가족은 대체로 걱정과 고민이 많다. 내가 독립하고 나서 따로 살고 있는 동생은 종종 뜬금없이 나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말한다. "누나. 나 오늘 저녁 돈가스 먹을까, 메밀 먹을까?"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꼭 그런 사소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처럼 한숨을 쉬며 메뉴를 골라준다.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민과 걱정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성향이 짙어진 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할머니는 집 안에, 할머니가 쓰는 큰 안방 또는 부엌에 앉아 계셨다. 더운 여름에는 거실의 차가운 나무 바닥에 창문을 열어 놓고 누워 계시기도 했다. 거실 창문과 부엌 창문을 둘 다 열어두면, 바람이 통해서 아주 시원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풍기를 켜며 "선풍기가 더 시원해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봄과 가을에도 늘 거기에 있었다. 할머니가 집을 비워봤자 시장에 가거나, 집 근처 아파트 상가에 있는 뜨개방에 가거나, 주말에는 교회에 가는 게 다였다. 나에게 할머니는 늘 내 눈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오래된 주택이었던 우리집은 대문 열쇠가 없으면 집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자주 물건을 놓고 다녔던 나는 는열쇠가 없을 때마다 할머니들이 모여있는 뜨개방으로 갔다. 뜨개방에는 할머니들이 커다란 담요를 나눠 덮고 동그랗게 앉아 뜨개를 하고 있었다. 종종 내 필통과 보조 가방을 떠주셨다.


그러다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는 할머니가 집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리가 아파 잠시 정형외과에 입원했다. 그때는 할머니가 금방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정형외과에서는 할머니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암세포가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폐에 생긴 암이었다. 할머니는 오랜 시간 담배를 태우셨다. 담배를 시작하게 된 때는 알지 못하지만, 종종 할아버지 때문에 속상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형외과에서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고모부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암세포가 이미 뇌까지 퍼져 있다고 했다. 치매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할머니가 떠나고 나는 자주 불안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장실 문이 열려 강아지가 비누를 먹으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혹시 전기장판을 켜놓고 나오지 않았을까 걱정하고, 아침에 끓인 찻물을 그대로 두고 온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할머니가 집에 있을 때는 고데기를 켜고 나와도 전화해서 꺼달라고 할 수 있었는데. 나의 작은 실수들을 보살펴주었던 할머니가 이제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갔다가 그런 불안감이 심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며,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안절부절못했고, 결국 나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집에만 있는다고 해서 이런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잊힐까 두려웠고, 학교 성적이 걱정됐으며, 어떻게 이 깊은 마음속에서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괴로웠다. 긴 생각 끝에 결정한 내 방법은 나가기 전에 내가 불안해하는 부분들의 사진을 찍어놓고 나가는 것이었다. 고데기를 끄고 나서 사진을 찍고, 밥 먹고 나서 인덕션 사진을 찍고, 강아지가 먹어서 위험한 건 없는지 바닥 사진을 찍었다. 웃긴 건 그렇게 사진을 찍어놓고 나가면, 밖에서는 사진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의 깊은 불안감은 조금씩 해소되었다. 지금의 나는 많이 편안해졌지만, 때때로 작은 불안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를 괴롭힌다.


몇 년 전, 봄이었지만 계절은 아직 겨울이라고 느껴질 때쯤 영화 <미나리>를 봤다. 영화를 볼 때 자주 느꼈던 감정은 '불안감'이었다. 아빠 역을 맡은 스티븐 연이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남자에게 사기를 당할까 봐 불안했다. 서랍장이 떨어져 데이빗의 발이 부러지고 할머니와 엄마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무서웠다. 아빠가 넋을 놓고 병아리를 분류하다가 떨어트린 순간, 계단을 내려오던 사장이 두 부부를 해고하면 어쩌지 하면서. 나는 내내 불안했다.


그렇지만 영화 속 사건들은 정말 평범한 내 하루처럼, 큰일이 나지 않고 무난하게 지나갔다. 십자가를 지고 다니는 남자는 생각보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며, 데이빗은 서랍에 발을 찧었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고, 두 부부는 해고되지 않았다. 맞아. 어려운 일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지 않아. 큰 걱정 없이 보살피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는 결을 따라 자라는 미나리처럼, 우리 삶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알면서도, 이렇게 생각했으면서도 아마 나는 내일도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거다. 내 동생도 내일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걱정할 거고, 우리 엄마도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거다. 그렇지만 이전과 오늘의 내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감정에 휩싸여 내 생활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거면 됐다. 우리가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그거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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