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버킷리스트'라고 해서 한동안 버킷리스트를 적고 SNS에 올리는 일이 유행인 때도 있었다.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변하지 않는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우유니 소금 사막에 가기, 스쿠터 타기, 귀엽고 작은 타투 하기. 사실 모두 지금 실행할 수도 있는 일들이지만, 우유니 소금 사막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실행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다. 오랜 시간 가지고 있는 소망이지만, 가족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 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잔잔하게, 너무 깊지 않게 가지고 있는 작은 소망들.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꾸리며 '취향'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단순하게 꽃무늬 이불이나 커튼, 빈티지한 원목 컬러를 좋아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런 취향들이 더 깊이 생기고 있다. 나는 도자기 오브제를 좋아하고, 매끈하고 하얀 도자기가 아닌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선을 좋아한다. 질감이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것이 좋다. 아주 차가워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없는 느낌을 좋아하진 않는다. 취향이 쌓이다 보니 모두 돈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당근마켓을 더 애용하게 됐다.
당근마켓이라고 모두 저렴한 것들은 아니었다. 빈티지한 물건들은 희소성이 중요한 거고, 희소하고 컨디션이 좋을수록 값은 올라간다. 가끔 계절 꽃을 사다 화병에 꽂아두는데, 큰 화병이 필요해서 찾아보던 중에 망원동 <정오의 빛>이라는 공간에서 판매하는 일본 도자기 화병을 보게 되었다. 금액대도 적당하고, 가장 좋아하는 베이지색에 굵은 선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도자기였다. 판매자에게 연락을 해서 아주 추웠던 겨울 날 합정역에서 만나 거래를 했다. 판매하시는 분은 무척 친절하시고 웃는 모습이 화사한 또래 여성 분이었다.
그렇게 화병은 우리집에 왔다. 집에서 조촐하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놀러 온 친구가 아름다운 겨울 꽃들을 사 왔다. 베이지색을 띤 화병에 빨간 꽃을 꽂아 두니 더욱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그 도자기는 일 년이 넘도록 우리집에서 화병의 역할을 해 주었고, 때로는 그 자체로 힘이 있는 오브제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물건에 정이 들었을 때쯤, 당근마켓 알람이 울렸다. 도자기를 판매했던 판매자였다. 장문의 메시지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 도자기는 판매자님과 만나던 분이 선물로 주었던 거고, 이별 후에 물건을 정리하면서 판매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선물해 주었던 분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추억할 물건들을 찾다가 나에게 메시지까지 보내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금액은 원하는 금액대로 드리겠다고, 도자기를 꼭 찾고 싶다고 하셨다.
사정을 듣고 나니 잘 가지고 있던 도자기를 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도 물건에 애정을 담는 편이기에 다시 보내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내가 구매했던 금액으로 맞춰드리고, 도자기를 판매자님께 다시 보내기로 했다. 판매자님은 고마운 마음을 힘껏 표현하셨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날, 내 당근마켓 판매 목록에 있는 빈티지 치마도 함께 구매하고 싶다고 하셨다. 도자기를 마른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깨지지 않게 뽁뽁이로 감쌌다. 판매할 치마도 잘 정돈하여 도자기와 함께 쇼핑백에 넣었다. 판매자님이 우리집 앞으로 찾아오셨고, 도자기와 치마를 전해드렸다.
그날 판매자님께 다시 메시지가 왔다. 치마도 아주 꼭 맞고 도자기도 잘 간직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판매자님은 합정과 홍대쪽에서 타투이스트로 활동하시는 분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는 책 취향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옷 스타일도 비슷했다. 판매자님은 타투하기를 원하신다면 무료로 해 드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판매자님이 평소 작업하시는 그림을 보니 내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타투 디자인과 비슷해서 당장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또 그만큼 싫어할 가족들을 생각하니 망설여졌다. 그래서 판매자님께 무척 하고 싶지만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다음에 용기가 생기면 꼭 판매자님께 타투를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을 약속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인스타그램을 알게 되었고, 일상을 알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여름을 맞아 타투 스티커를 제작하셔서,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우리집 우체통에 다정한 인사가 담긴 카드와 함께 놓고 가셨다. 추워지는 겨울,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따뜻한 커피를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겨울날 마주 앉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사이처럼 편안하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할 것이다. 취향이 만들어주고 있는 인연 덕분에 타투를 하지 않아도 인생의 또다른 버킷리스트가 채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