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는 것만큼 받는 것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와 동갑인 딸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친절하진 않지만 누구보다 우리의 마음을 금방 눈치 채는 것 같았다. 왠지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 때문에 더 자주 실수했고 그러다가 선생님이 나의 실수를 언급하시면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선생님이 한 달에 한 번씩 꼭 하던 행사가 있었다. 생일인 친구에게 메모지에 편지를 쓰게 하는데, 그림을 그려도 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게 했다. 그리고 그 메모지를 단단한 실로 묶어서 '편지책'을 만들어주셨다. 3월에 시작된 그 이벤트는 매달 순조롭게 이어졌다. 선생님은 그 편지를 넘겨보며 재미있는 축하 글은 읽어주시기도 했다. 그럼 아이들은 다같이 깔깔 웃었다.
나도 빨리 편지책을 받고 싶었다. 내 생일은 9월. 여름방학이 끝나고 돌아와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반가우면서도 어색한 시간이다. 편지책을 받고 싶었던 건 친구들에게 축하 받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선생님이 내가 받은 재미있는 축하 메시지를 읽어주시는 것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9월이 되었고, 생일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할머니가 음식을 해 주시기로 했다. 그땐 롯데리아에서 8명 정도의 친구를 불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었지만 아빠는 할머니 음식이 더 맛있다며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김밥, 불고기를 만들어 주셨고 아빠가 피자를 주문해 줬다. 친구들과 집에서 차려진 음식을 먹고 집 옆에 있는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주인공이 되어 꽉 찬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학급의 중요한 이벤트 날이 되었다. 9월의 마지막 날, 9월 생일자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 되었다. 그때 우리 반에는 다른 달보다 9월 생일인 친구들이 현저히 적어 금방 내가 받은 편지들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편지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과 함께 축하 메시지를 적어주었고 한 친구는 우리집에서 열린 생일파티에서 먹은 할머니 김밥이 맛있었다는 글을 남겨주었다. 선생님은 요즘 부모님들이 바빠서 다들 밖에서 생일파티를 하는데 민지의 생일은 할머니 덕에 더 특별했겠다고 말하며 나를 보며 웃어주셨다.
마음 한켠에는 롯데리아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계속 있었는데 할머니의 시간과 음식 덕분에 나의 생일이 더 특별해졌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이 써 준 편지들을 반복해 읽었다. 친해지고 싶지만 똑 부러지는 인상 때문에 말 걸기가 어려웠던 친구가 남겨준 편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남자 아이가 남겨준 편지, 등하교를 함께하고 있는 친구가 남겨준 편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길어야 세 줄, 짧으면 그림밖에 없었던. 어떤 글자는 꼬불꼬불하고 어떤 글자는 단정하게 각져있는, 각기 다른 글씨체들이 나의 마음에 용기를 채워줬다.
그날부터 나는 선물 상자를 버리지 않고 그 상자 속에 편지를 보관했다. 아직도 아빠의 집 책장 위에는 먼지 쌓인 선물 상자가 놓여 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쓰고 읽는 건 어린이가 자라나는 데 필요한 칼슘과 비타민 역할이 되어준다는 것을. 친구들과 선생님, 부모님이 나에게 남긴 글은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자라게 했다. 대학생이 되고 어느 날 파주에 놀러갔을 때 나는 출판단지에서 "나는 졸업하면 여기에서 일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출판단지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다. 그것이 내가 어른이 되어 들어간 첫 번째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