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되어서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나만의 애드보커시
나의 첫 직장은 작은 환경단체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선배들이 알려주신 대로 감을 익히고 보조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일들을 하다가, 하나 둘 스스로 프로그램을 기획해보고 사람들 앞에서 프로그램의 한 두 꼭지를 직접 이끌거나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옆에서 지켜보거나 보조를 할 때는 너무 처음이거나 혹은 주연이 아니다 보니 사회자나 강연자인 선배들의 모습만 멋있게 보였는데, 막상 내가 앞에 몇 번 서고 나니 너무 부끄러웠다. 어떨 때는 아주 작은 소그룹 앞에서 설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아주 큰 기업의 대학생캠프나, 선생님들의 모임, 기업의 사회공헌팀에서 대규모로 마련된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사회나 강의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때면 너무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낯설었다.
그런데 몇 번 그런 자리에 서고 나니 내 부끄러움이 단지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숫자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진짜 부끄러웠던 이유는 나 역시 내가 하는 말의, 강연하는 내용들에 따라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람들 앞에 설 때는 보통 기후변화나 지속가능 발전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항상 무대에서 내려오면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사실 자연에게 지금과 같은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라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의문이 들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이상 나 역시 이런 상황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데 사회적,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내가 과연 이 소비와 생활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시 의문스러웠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하나씩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고자 노력했고, 또 단체에 있다 보니 단 하나의 습관이라도 자신의 애드보커시처럼 꿋꿋이 실행해나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서 나 역시 편안하게 또 재미있게 친구들과 그런 활동을 이어갔었다. 단체에 있으면서 주말마다 텃밭을 가꾸고 유기농 카페에 대중교통으로 납품을 하기도 하고 채식도 그때 처음 친구들과 재밌고 맛있게 실천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 실천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던 즈음에 나는 필리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하게된 새로운 일은 바로 마을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지역운동, 커뮤니티 디벨롭먼트를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한가지 문제는 이 역시 나 자신을 마을 주민들에게 소개할 때부터 나를 무척이나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나야말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을 떠나와 이 낯선 타지 마을로 날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왔다고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먹고살기 위해, 생계를 위해 지역을 떠났다. 태어나 보니 마침 서울, 마닐라 등의 대도시였고, 그곳이 원래 나의 집이자 내 가족이 살고 있는 고향이라면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겠지만 지방은 달랐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세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 어쩌면 그 윗세 대들도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을지 모른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나는 또 내가 지킬 수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들을 상쇄시킬 만큼 뿌듯함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는 마닐라의 슬럼들이 강제 철거되면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살게된 이주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마을 안에 사회적 기업들을 만드는 일이었다. 처음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가난한 마을 하나를 도우러 간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사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돕고 배우는 관계였다는 것을 배웠고, 그게 좋아서 어쩌다 보니 현지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이끌었고 그 마을에 대한 논문까지 쓰게 되었으니, 마지막 즈음엔 아마 지금즘이면 나도 반은 지역주민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잠시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필리핀도 한국도 내 집 같거나 오히려 어느 곳도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즈음에, 나는 이곳이 좋아도 내가 평생을 살고 싶은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국 함께 사는 것과 연결된다는 교훈을 얻고 나니 나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나니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나는 이제 내 갈 길이나 잘 찾아 나가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에 머물었던 마을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을 더 잘 알고 있나 싶었고, 내가 한국에 들어간다면 이번만큼은 내가 말하던 대로 서울이 아니라 고향에 돌아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진…
뜬금없이 내 인생에 나타난, 나와는 다른 색의 눈동자를 가진 아이와 연애를 하게 되면서, 우리는 각자 대학원을 마치면 먼저 직업을 가진 사람의 나라로 떠나자는 협상을 하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그렇게 다시 자신의 나라를 떠나게 된 사람은 내가 되어있었다.
생각지 못하게 살게 된 베를린은 사실 비건들의 천국으로 꼽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마음만 먹으면 비건으로 살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나의 마음은 예전처럼 끌리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머물거나 여행을 했던 나라들은 그 수만큼이나 음식들도 달랐는데, 사실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처럼 반찬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또 경제적 수준의 차이이기도 했는데, 내가 머물던 필리핀의 마을 사람들의 주식은 기본 밥 한 덩이에 반찬 하나였다. 반찬 하나를 가장 저렴하면서도 힘이 나게 먹으려 하다 보니 사람들은 고기반찬을 먹었다. 야채는 신선할 때나 아삭하고 맛있는 거지 그러려면 냉장고도 있어야 하고 전기도 써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고기를 사놓는 게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더 나은 선택인 듯했다.
아프리카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직접 현지 사람들과 살아보니 사람들의 식탁 위에는 어떤 음식이 있는지, 그 사람들은 왜 그 음식을 먹는지 내가 모르는 스토리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건이나 채식에 대한 애드보커시는 충분히 존중하고 동의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분들께는 존경의 마음까지 들지만, 나의 애드보커시의 이유만으로 내가 모르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다른 사람들의 식단에 대해 내가 함부로 비건으로 모두 전향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의 상황도 제대로 모른채 무조건 바꾸려 하면 오히려 그것이 환경에 더 거스를 수 있고, 또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습관까지 영향을 미쳐야 커다란 시스템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선은 다른 사람들에 앞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았는데, 나는 아무리 베를린이 비건의 천국이라고 해도 비건으로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설명을 할 때 어떤 특정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과연 그 행동을 꾸준히, 지속 가능하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비건이나 채식은 분명 가끔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매일같이 평생, 죽을 때까지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답하라고 하면 그렇지 못했다. 오늘부터 채식을 한다고 말을 해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포기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고기를 엄청 좋아하거나 매일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한국음식이었다. 해외에 살다 보니, 한국 음식이 나도 모르게 너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사실 그저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뿐인데 그 안에 고기가 있어서 고기까지 먹는 것뿐이지 고기가 들어 있어서 그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해외에 사는 이상 나는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을 때가 있을 테고 그럴 때마다 나는 고기를 먹게 될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채식주의자는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신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채식주의자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와 남편은 매주마다 시작되는 작심삼일 베지테리언이 되기로 했다.
채식과는 달리 오히려 유럽에 와서 나는 예전에는 몰랐지만 내가 실천할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찾게 되었는데 바로 빈티지 제품, 혹은 옛말의 아나바다였다. 베를린에는 비건 음식점만큼이나 빈티지 가게들이 즐비했다. 여전히 새 옷, 새 그릇, 새 차, 새가구를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깔끔하고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빈티지 가게들을 둘러보다 보면 굳이 새로운 상품을 사야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주말에는 동네의 크고 작은 광장마다 플리마켓이 열렸고, 요즘은 온라인으로 거래하는 빈티지 물품들도 크게 늘었다.
처음 신혼살림을 준비하면서 남편이나 나나 둘이서 가져온 것이 하나 없었는데 남편은 베를린에 올라올 때 빌린 트럭 하나에 남편 고향 주변에서 무료로 내놓은 침대와 소파와 탁자, 그리고 식탁의자 세트를 모두 챙겨서 올라왔었다. 나머지도 주말에 열리는 벼룩시장과 온라인 빈티지 마켓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 사 와서 보니 어느새 우리 집의 물건 절반이 빈티지 마켓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새로운 상품은 덜 소비하고 다시 쓰거나 나눠 쓰는 빈티지 마켓에 빠져있었다.
언제나 환경과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면서도 항상 성장과 무한생산을 잊지 않는 자본주의의 패턴이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아, 항상 무언가를 쓰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편에 불편함이 있었다. 여전히 나는 어떤 것들은 새로운 상품을 사야 할 때가 있을 것이고, 빈티지로도 찾지 못하는 서비스가 있다면 기존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마음 편히 말하는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엔 왠지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것은 느낌. 이번에는 정말 말하는 대로 나는 특별한 가치들을 위해 빈티지 물건들을, 중고 상품들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