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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ug 19. 2023

필리핀 사람들이 쌀을 싫어했다고?

고고학과 지속가능성의 상관성


인류학과 수업은 인류학과 학생들만큼이나 타과 학생들도 많이 수업을 듣는다. 고고학 역시 인류학과 학생들만큼이나 필리핀학, 지역학, 동남아학이나 역사학과 학생들이 많이 들었고, 필리핀 국립대학교 특성상 그 학생들 역시 필리핀 전국에서 올라온 학생들이라 학생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가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분명 시작은 영어로 했던 수업 같은데 누군가 한 명이 자신의 어린 시절 혹은 마닐라 외의 다른 섬의 다른 언어를 가진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다른 섬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가진 무언가를 꺼내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사이 따갈로그어와 영어밖에 모르는 나는 미아가 되어버리기 쉽상인 수업이었다.


세미나의 본질이 그렇게 모르는 것들을 새롭게 배워가는 것인데, 하물며 필리핀 사람인데도 자신들의 나라의 일부를 모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니 이 모든 과정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행히 교수님이 이런 나를 수업 중간중간 계속 체크하셨고, 수업이 끝나면 본인의 일정에 상관없이 그날 있었던 토론 내용에 대해 30분이고 1시간이고 1대 1로 앉아 개인 브리핑을 해주셨다.


그런 배려들 덕분에 나는 적어도 수업 교재와 읽을 과제들은 제대로 읽어 가려고 노력했다. 잠시 잠깐 길을 빠져나가더라도 결국 모든 대화는 수업 시간중에 일어나는 것이니 결국 대화는 다시 교재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고고학을 배우며 의도치 않게 무언가를 읽는 재미에 빠졌다. 물론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두꺼운 주 교재를 읽을 때는 정말이지 꿈속에서도 자꾸 사막 한가운데서 한참 뼈를 찾다가 깨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열 페이지에서 스무 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소논문이나 저널들이 부교재에 포함되면서, 21세기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고고학의 장면 중에 지금 내가 사는 공간과 사람들의 모습과 연결돼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을 발견하면 그게 무척 재미있었다.




어쩌면 한국 사람들보다 더 밥을 좋아할지 모르는 필리핀 사람들


그중 하나가 바로 밥이다. 우리나라 사람, 한국인들이 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밥사랑은 어느 나라에 뒤쳐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밥을 이렇게 많이 먹는 나라는 처음 봤다. 가장 극단적인 예시라 하면 바로 우리나라에도 있고 필리핀에 있는 맥도널드, KFC, 그리고 필리핀 사람들의 롯데리아 같은 자국 브랜드 졸리비의 메뉴판이 그렇다. 아무리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나라라고 해도 패스트푸드점에서까지 밥을 먹지는 않는데, 필리핀은 햄버거 메뉴는 물론 치킨, 스파게티 메뉴에도 밥 한 공기가 세트메뉴로 자리하고 있다.



필리핀 패스트푸드 메뉴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밥 한 공기



내가 처음 필리핀 패스트푸드점에 갔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이 패스트푸드 메뉴 구성에 저 밥 한 공기가 꼭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밥 한 개만 빠지면 딱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은 메뉴 같았는데, 있는 그대로 사면 왠지 백 퍼센트 그 밥을 먹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점원에게 물었었다.


메뉴 가격 그대로 살 건데 내가 밥을 먹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면 버리는 것이 매우 마음이 불편할 것 같으니 혹시 밥을 빼고 메뉴를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 필리핀 점원은 확고했다. 내가 도대체 왜 햄버거와 밥을 함께 먹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점원 역시 어떻게 밥을 빼고 가져갈 수 있는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분명 우리는 둘 다 밥을 사랑하는 민족 같았지만, 그들은 내겐 없는 밥의 의미를 아마 몇 개 더 갖고 있는 느낌이었다.


필리핀의 현대사에서 국제적 뉴스에 까지 오르내리던 이슈 중 하나는 쌀, 밥이 있었다. 60년대 필리핀의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쌀 품종 개발부터 동남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삼모작 국가로 쌀을 수출하던 나라에서 2000년대부터 전 세계 식량 위기가 터질 때마다 직격타를 맞는 대표적인 아시아의 쌀 수입국으로 전락한 지금 상황까지 필리핀과 쌀은 망고와 바나나처럼 연결된 듯하다. 굳이 필리핀 현대사를 털어보지 않아도, 필리핀의 대표적인 산간지역인 루존섬 북부의 라이스테라스의 경우 우리나라 한라산만큼이나 높은 산골 지역에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식 논을 만들어 왔는데 인류학자들은 이 논이 길게는 2000여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고 이야기한다.



1500m 산지에서 끊임없이 내려가는 필리핀의 계단식 논



필리핀 사람들의 식탁을 살펴봐도 그렇다. 우리나라 중산층 가정처럼 여러 가지 반찬을 소비할 수 있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면 필리핀 국민의 절반이 넘는 일반 가정의 경우, 넓은 접시 하나에 우리나라 고봉밥 크기보다 거대한 대접 사이즈로 퍼다 놓은 밥 한 그릇 옆에 반찬 한 개, 많으면 두 개를 올려놓고 간장이나 고추기름을 밥 위에 소스처럼 뿌려 먹는 것이 보통이다. 필리핀 대중들이 좋아하는 치킨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망이나살 (Mang Inasal)의 인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릴 치킨 한 조각에 하얀 쌀밥을 무제한으로 리필할 수 있는 옵션 때문이다.



닭다리 한 조각에 무한리필로 밥을 먹을 수 있는 망이나살 메뉴



부의 크기와 상관없이 내가 만난 누구나 필리핀 사람이라면 언제나 나와 함께 밥을 먹었거나 먹었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처럼 자주 밥을 먹었지만 반대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반찬 대비 어마무시한 밥의 양이나 우리나라라면 절대 볼 수 없을 밥과 함께 따라오는 다른 메뉴들까지 낯선 풍경들이 겹쳐졌다. 그래서 같은 쌀문화권이라곤 하지만 나에게 필리핀은 밥을 소비하는 사뭇 다른 양식 때문에 확실히 같은 아시아 국가라고 해도 여전히 다른 타국처럼 느껴졌었다.  




필리핀에 처음 쌀이 들어왔을 때


그러다 보니 쌀에 대한 필리핀 고고학 문서에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필리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나타났을 때, 나는 고고학이라는 타임머신이 필리핀이 아닌 다른 나라에 도착해 유적들을 파헤친 것은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지구라는 동그란 구를 이모저모 살펴보면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주식'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식량이 어떤 것인지는 5대양 6대주만큼이나 다양하다.


내가 처음 남아공에 갔을 때는 밥 없이 6개월 동안 밥이 아닌 다른 것을 먹었고, 유럽에서는 파스타나 빵처럼 밀을 주식으로 한 음식을 먹었다. 인류의 역사가 글자라는 수단으로 기록되기 이전 시간의 필리핀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식은 바로 쌀도 밀도 아닌 다른 재료들이었다. 우리가 필리핀이나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바나나, 타로, 뿌리 식물들이 그것이다. 이들 작물들은 특별히 계획적인 농사를 짓지 않아도 나무에 알아서 주렁주렁 자라기도 했으며, 땅 속에서 덩굴처럼 끝없이 생겨나기도 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굳이 힘들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자연에서 자라나는 식물의 열매들을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맨 처음 쌀이 필리핀 섬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쌀을 싫어했다고 한다. 쌀 혹은 밥 맛 자체를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쌀이 어떻게 입 속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그 과정을 싫어한 듯하다. 인류라는 인간에겐 기다란 역사의 막대그래프에서 괜히 문명과 비문명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에 농경의 시작을 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농사를 짓는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것이 입에 들어가면 한 입 크기지만 막상 생산하기엔 바나나보다 무척 까다로운 작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가마의 쌀을 얻기 위해 인간은 잘 개간된 땅과 너무 깊지도 그렇다고 마르지도 않는 물이 필요하며, 씨앗에서 싹이 트고, 그것이 자라서 쌀이라는 곡물을 맺기까지 인내의 시간을 갖고 키워내야 한다. 기껏해야 손을 뻗어 바나나를 떼어먹거나 땅을 파서 토란을 끄집어내는 노동에 비하면 왜 굳이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쏟아 쌀을 키워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석기시대 필리핀 사람들에겐 오히려 합리적인 생각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그렇게 논문을 읽다 보면 21세기에 살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던 필리핀의 밥 한 공기가 어느새 바나나와 토란으로 대체되는 상상을 해보며, 그렇다면 어떻게 필리핀에서 쌀이 이렇게 바나나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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