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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ug 27. 2023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필리핀 귀신을 만났다

필리핀 귀신에겐 없지만 우리나라 귀신에겐 있는 것





민속학, 인간은 무엇을 왜 믿는가?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인류학과 수업은 보통 필리핀 국립대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팔마홀이라는 곳에서 진행되곤 했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학생들은 교실 자체, 우리가 앉는 걸상과 교구들 자체가 어쩌면 고고학적 유물로 간주될 정도로 오래되고 낡은 유적일 것이라고 말하는 곳이었다.


한 낮엔 이제 갓 스물을 넘나드는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교실을 찾아 들어가고 열대 지역의 뜨거운 태양이 건물 구석구석을 환히 밝히지만, 밤이 되면 기나긴 복도 끝은 보이지 않아 혼자서는 화장실을 가는 것도 망설여질 정도로 어두운 건물 꼭대기층에서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하필 이런 와중에 교수님의 이야기보따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필리핀 귀신들이었다. 보통 귀신 이야기는 여름에 들어야 등골이 서늘해진다고 하지만,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선 귀신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내 등 뒤에서 나는 것은 여전히 뜨거운 땀 줄기라 귀신 이야기는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분명 그날 강의 주제는 인간들은 무엇을 믿는가, 인간들의 신념체계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갔던 것 같은데, 왜 필리핀 귀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초반에 언급했던 대로 인류학은 인간이 상호작용을 하는 거의 모든 학문과 결합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류학의 대표적인 분야 중 하나가 바로 귀신과 미신, 관습 등을 연구하는 민속학이었다. 민속학은 지금의 언어로 말하면 항간에 떠도는 카더라 하는 루머들 중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전래되어 온 습관, 제도, 신앙들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학문이다. 그 안에는 이솝우화나 탈무드 같은 전래동화부터 무당의 굿과 점까지 아주 어린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믿음까지 모두 포함한 거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담은 학문이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 무엇이 달라서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들을 수 있는 답변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은 보이는 것들과 소통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념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소통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수가 들어가면 수학이 되고 신이 들어가면 종교가 되기도 했는데, 내가 정작 까먹고 있었던 것 중 하나에 귀신도 들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귀신보다는 여전히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곳에서는 길조라고 반기는 것이 다른 곳에선 흉조라고 꺼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접하곤 했는데, 형체가 없는 귀신들도 듣다 보면 국적이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누구에게 어디에서 들었는지에 따라 귀신들도 달라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내 경우엔 귀신들보단 오히려 이 사람들은 왜 그런 존재를 만들었고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그 사람들이 더 흥미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필리핀 귀신 그려보기


그렇게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어간 인류학 수업에서 그날은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필리핀 귀신들을 무방비 상태로 듣게 되어 버렸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생각하지 않으려 할 때마다 코끼리가 머릿속에 더욱더 맴도는 것처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야기꾼들인 인류학 교수님이 들려주는 필리핀 귀신 이야기들은 귀를 막으려 해도 귀신처럼 귓속에 들어와 내 머릿속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문제는 내가 코끼리는 실제로 본 적이 있어서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아주 선명한 코끼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면 필리핀 귀신들은 내가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서인지  내 상상 속에 잠시 나타나는 듯했지만 멋쩍은 듯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처음 들어본 영어 이름이거나 필리핀 언어를 가진 이름이라 귀신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에 저장되지 않았지만, 대신 몇몇 인상적인 특징들은 그 희미한 무언가가 귀신이었다는 이미지를 남기고 갔다.


마치 소개팅 앱에서 개인의 정보를 하나의 카드로 짧게 짧게 넘겨보듯, 그 수업 중에는 필리핀의 내로라하는 귀신들의 프로필들이 짤막 짤막하게 브리핑되고 있었는데 듣다 보니 몇 가지 공통점이 나타나는 듯했다.


한 가지는 처음 들어보지만 뭔가 익숙한, 어디서 본 듯한 귀신의 그림들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낯선 필리핀어 이름을 가진 귀신이라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가만히 듣다 보면 끝에 가서 뱀파이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좀비가 나타나는 듯도 했다. 왠지 300년 넘게 이어졌던 식민기간 동안 스페인이나 미국에서 이민자들과 함께 넘어온 귀신들이 시간이 지나며 필리핀화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몇 가지 필리핀 스러운 특징들을 제외하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말처럼 귀신들도 뭔가 비슷한 점들이 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는 임산부와 관련된 귀신들이 유독 많이 들렸다는 것이다. 특히 어떤 귀신 하나는 기다란 촉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촉수로 임산부들의 배꼽을 통해 태아를 빼앗아 간다고 했다. 뭔가 기괴하면서도 거대한 나비가 떠올라 혼자 이렇게 상상을 하는 게 맞나 싶다가, 그렇다고 차마 귀신 사진까지 확인하고 싶진 않아 천천히 날개를 접은 상상이었다. 어찌 보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오래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미신, 또는 귀신인 듯한데, 아마도 예전 필리핀에는 임신한 여성들이 아이를 잃는 경우가 무척 많았나 보다고 떠올려보았다.



필리핀 귀신과 한국 귀신의 다른점


필리핀 귀신 이야기의 세 번째 특징은 내가 듣고 있던

필리핀 귀신들에 더불어 내가 어릴 적부터 들었던 한국의 귀신 이야기들이 겹치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적 봤던 구미호부터 장화홍련, 학창 시절 여름방학마다 나왔던 여고괴담까지 지금껏 봐왔던 우리나라 귀신 이야기들을 오랜만에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어 보았다. 그리고 교수님의 귀신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문득 이런 질문이 하나 들었다. 가만히 손을 들은 나는 교수님께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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