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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마흔

스무 살의 나에게 보내는 시그널

by 따뜻한 선인장

스무 살, 나는 케이프타운의 어느 거리를 매일 같이 걷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봐도 매번 신기하고 오묘한 테이블 마운틴을 바라보며 아침마다 30분 정도를 어학원까지 걸어 다닌 지 한 달이 채 안 돼 가던 날이었다.


어쩌다 학원 친구들에게 나는 아침마다 항상 걸어서 다닌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거의 모든 이들이 내게 미쳤냐고,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모르냐고 화들짝 놀랐다. 조언이 아니라 거의 경고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오는 길에, 그동안은 잘 눈에 띄지 않았던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거리에 주차된 차들 중에 이렇게 유리창이 깨진 차들이 많을까. 왜 집 주변에 전깃줄로 담을 둘러싼 집들이 많을까.


이렇게 풍경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장면인데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니 음침하고 스산한 무언가의 흔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그림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처음 들었다. 분명 공주님과 왕자님의 해피엔딩인 줄 알고 들었던 어릴 적 우화들이, 알고 봤더니 살벌하고 끔찍한 현실을 내포하고 있었던 유럽의 중세 동화처럼, 스무 살의 나는 보이는 것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깨진 창문의 자동차들을 보며 왜 글로벌 사우스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고, 그러면 그 반대의 나라들에선 왜 이런 일들이 덜 일어나는지도 궁금해졌다. 그렇게 케이프타운의 어느 길거리에서 스무 살의 나는 어렴풋이 이런 다짐을 했었다. 이십 대에는 사람들이 못 산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에 살아보고, 삼십 대에는 잘 산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에 살아본 뒤, 사십 대에는 이 두 가지의 경험을 담아 한국에서 살아 보고 싶다고.


누구나의 스무 살이 그렇겠지만, 스무 살에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시간인지라 스무 살의 내게는 아직 먼 시간처럼 느껴지던 내 이십 대와 삼십 대가 내게도 찾아왔고 이제 거의 다 지나가는 중이다. 스무 살 때 생각했던 내 이십 대와 삼십 대를 정말로 거의 모두 보내보고 나니, 그때 생각했던 많은 것들 중에 이뤄지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진짜로 이뤄진 것들도 있었다.


스무 살이 두 번째로 찾아오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나는 스위스에 살게 되었다. 얼마나 여기에 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스무 살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내 이십 대는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서 이십 대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삼십 대에는 남들이 이민을 간다면 가보고 싶다고 언급되는 나라 중에 몇 나라에서 꼬박 살게 되었다.


스무 살의 나였다면 무조건 꿈을 가져서, 꿈이 있었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다고 말했겠지만, 마흔이 가까워진 나는 이제 내가 가진 이상만큼이나 딱 그만큼의 현실도 알게 되어서 그게 꼭 꿈을 갖고 있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진다. 절반은 맞는 말이고 절반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스무 살의 절반을 남아공이라는 나라에서 보내며 국제개발이라는 분야에 순수한 내 마음을 빼앗겼고, 그 마음 그대로 내 이십 대의 나머지 시간을 온전히 그 분야, 지역과 사람들을 알아가는 데에 보냈다. 대학을 마치고 남아공은 아니었지만 필리핀의 국제개발 현장에서 일을 했고,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현지의 시선을 이해하고 싶어 공부도 그곳에서 마쳤다. 처음부터 필리핀을 굳이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내가 마음에 품은 것은 국제개발이라는 키워드뿐이었는데도 나에게 일과 학업까지 이끌어주었으니, 내가 품은 마음을 변치 않고 주어진 대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이어간다면 아마 이곳에서 결혼도, 가족도, 커리어도 이어가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내 이십 대와 필리핀에서의 석사 과정이 막을 내려가던 즈음, 서른이 되던 해에 문득 내가 스무 살에 떠올렸던 그 결심이 떠올랐다. 나의 삼십 대에는 남반구와는 반대인 북반구의 나라들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사실은 한 번 있었다. 현장 경험을 쌓은 후, 현장에서 얻게 된 질문을 대학원에서 풀어보고 싶을 때, 그 당시 내가 관심 있던 학과와 국제개발 영역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던 북유럽 국가가 내 마음에 들어왔었다. 필리핀에서 공부한다면 내가 현장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현지의 시선과 맥락을 더 자세히 배울 수 있겠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북유럽 대학원들의 프로그램을 이어간다면 현장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영감들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대학원을 선택하기 전, 나는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북유럽으로 떠났다. 스웨덴과 덴마크, 핀란드와 노르웨이에 내가 관심 있던 대학원 리스트를 만들고 직접 캠퍼스를 방문하고, 오픈 강좌가 있다면 실제로 들어가 내가 만약 이곳에서 공부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그려봤었다. 그렇게 모두 돌아보고 난 뒤, 놀라웠던 건 오히려 필리핀에서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마음이 더 선명해졌다는 것이었다. 국제개발 프로젝트의 성공 케이스가 드문 이유는 아직까진 공여국의 목소리보다는 수혜국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해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반구에서 북반구로의 삶의 방향을 틀어볼 수 있었던 시점에 나는 남반구, 현장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었다. 그렇다고 필리핀에서의 삶과 학업이 쉬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하루 먹을 만큼의 만나가 주어지듯이 필요한 만큼의 일거리와 장학금이 끊어질 때쯤이면 다시 이어졌다.


나는 이십 대를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들에서 보냈다 보니, 이런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임을 알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기회를 잃은 사람도 봤고, 운이 왔지만 노력을 하지 않거나 체력을 잃어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겪어봤기에, 이렇게 넘치진 않아도 딱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과 자원과 기회가 이어지는 곳이라면 내가 계속 살아볼 수도 있는 나라가 아닐까.


필리핀에 대해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그때, 그곳에선 적어도 나에게 운과 노력과 좋은 인연들이 이어졌고, 이렇게 한 해일 줄 알았던 필리핀에서의 삶이 2년이 되고 4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스무 살에 했던 생각과는 달리 앞으로의 인생이 펼쳐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일과 학업과 커리어도 이렇게 이어졌듯이 그렇게 이곳에서의 삶을 이어가다 보면 자연스레 내 연인도 가족도 이곳에서 이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각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정말 마법같이 깨졌다. 남들은 위험하고 힘든 나라라고 하는 나라에서 오히려 나는 내 사람들과 학위와 커리어까지 이어졌지만, 그런 감사한 기회들이 이어지던 십 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던 연인의 인연이 서른이 되자 나타났다. 나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삶에 있어서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이십 대를 내 커리어와 삶의 질문을 쫓아 살았던 것만큼이나 삼십 대에는 그동안 못해본 사랑을 해보는 것도 인간으로서 무척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단순한 연애도 30년 동안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어렵게 만난 인연이 처음부터 장거리 연애였다. 2년의 장거리 연애 동안, 우리는 세 번을 만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과연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얇고 단순한 하나의 실이 2년 동안 끊기지 않고 변함없이 이어져 결국 나를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끌어 당겼다.


사실 나는 그때에도 꼭 내가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남반구는 아직도 모르는 곳이 많고 넓고 다양했지만 북반구는 그에 비해 너무 작으면서도 그 넓은 남반구에서까지 모든 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자신이 사는 곳만을 고집한다면 우리에겐 인연의 다음이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아직 소득이 하나 없던 대학원생이었고, 이 장거리 연애를 끝내거나 인연을 이어가려면 결정해야 했다. 둘 다 모두 같은 곳에서 일자리를 잡는다면 좋겠지만, 나는 유럽에 살아본 적이 없고 남편은 아시아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누구 하나 먼저 일자리를 잡으면 다른 사람이 그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마 조금 더 잘 준비를 해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그 후에 살아봤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기에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름 이성적으로 내린 결정 뒤에 내 졸업 무렵 남편의 일자리가 이어졌고, 그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여 나는 그렇게 스무 살에 어렴풋이 생각해 봤던 북반구에서의 삼십 대의 삶을 그때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남편이라는 사람과 함께 독일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서른 살의 나는 스무 살의 나였을 때보다 오히려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에 대한 구분이 남들처럼 명확하진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왜 어떤 나라는 못살고 어떤 나라는 잘 산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는 대충 떠올려볼 수 있었지만, 막상 그런 나라들에 살아보면 어디에도 완벽한 천국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잘 산다는 나라에서도 그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고, 못 산다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 나라를 찾아와 남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 앞에 붙는 그 ‘잘’과 ‘못’의 경계는 어느덧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것이 된 것이다.


그런 편견과 진실 사이에서, 내가 그 어떤 나라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면 바로 현지의 어학원이었다. 그 나라의 어학원에서 가르치는 언어가 자국어이며, 자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자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면 그 나라는 세계적으로 선진국의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남아공과 필리핀 모두 아프리칸스나 따갈로그어를 가르치는 어학원보다 영어를 가르치는 곳들이 훨씬 많았고, 현지인들조차 그것을 당연시했는데, 독일건 반대로 독일어 어학원이 많을뿐더러 영어가 아닌 독일어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을 독일어를 배우고 싶게 만들었을까. 독일어 수업을 들으며 그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상상하는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분명 아메리카 대륙에는 아메리칸드림이 있다면, 유럽에는 도이치란드 드림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과연 그 드림이 리얼리티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 아닌 듯했다. 실책은 가장 먼저 나에게 있었다. 남아공에서도, 필리핀에서도 어떻게든 일을 하고 학업을 이어가고 집을 찾아냈던 나였기 때문에 나는 독일쯤이야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열심히 살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시도하거나 배웠던 사람이었던지라, 나는 독일에서도 결국 어떻게든 정착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남아공과 필리핀에서와는 지극히 정반대로 독일에 남겨졌다. 친구들은 매우 극소수에 지나치지 않았고, 무언가를 시도하면 시도하는 대로 족족 기회가 그대로 끊겨 버렸다. 밖에도 자주 나갔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진 못했고, 그렇게 일도 학업도 없이 어느새 필리핀에서 보낸 그 오랜 시간을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독일에서 보내고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독일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또는 더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부분들이 이제는 떠오른다. 하지만 그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후회나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만큼 내가 노력을 했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해외생활 또는 이민이라는 것을 고민할 때, 북반구와 남반구,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라는 관점보다는, 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대체적인 평판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와 한 개인 사이의 케미스트리 역시 해외생활을 이어 나가는 데에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독일에서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독일에서도 나다웠지만 그 나다움이 독일이라는 나라와는 잘 어울리지 않았었나라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글을 쓰고 불공정한 것들에 화를 내면서도 작은 것들에 쉽게 감동하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 나는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내가 더 노력했고 지금은 내가 덜 노력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그만큼의 노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리핀에서는 내가 정말 노력을 하면 그 노력의 가장 마지막 끝에 어떻게든 새로운 문이 열려 그것이 또 신기하고 감사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어가게 했다면, 반대로 독일에서는 노력할 때마다 그 끝에 문이 닫혀버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 끝은 정말로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 같아서 또 다른 문을 향해 달려가 열어보면 또 그대로 닫혀버리고, 또 열어보면 또 닫히고…


내 방법이 틀렸을 수도 있고, 예전만큼의 운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내 노력이 부족해서였을 수도 있고, 이유는 다양하고 아마 그 모든 것이 맞았을 수도 혹은 틀렸을 수도 있는데 분명한 건 그렇게 닫힌 문을 계속 열어보는 것은 재미가 없고 무척 지친다는 것이다.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고,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계속 시도하는데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마지막 연말을 보내며 올 한 해 동안 이룬 것을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에, 나는 내년에도 독일에서 살고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연스레 그동안의 독일에서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동안 새로운 일을 찾았고, 이직도 했고, 승진도 했고, 언어의 등급이 높아졌고, 아이를 키웠지만 그에 비해 나는 이룬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기분이 내려가고 자신감은 떨어지고 나는 나눌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던 그 시점에,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우울해하지만은 않은 내 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넌 아주 우울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도 싫고, 울고 싶고, 화내고, 실망하고, 짜증 내고, 모든 것에 부정적이고, 무기력해도 된다고!’


그런데 내 마음은 우울하다고만 말하기엔 부정할 수 없는 감사한 것들이 많은 것이었다. 내가 이십 대 내내 만나고 가봤던 수많은 글로벌 사우스 지역을 떠올려보면, 그때 만났던 현장의 아주머니들과 동료들을 떠올려보면 현실을 한탄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아마 코웃음을 치실 노릇이었다. 그럴 거면 그냥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서 진짜 한탄을 보여주겠다며 한탄 보따리를 주렁주렁 만들어 놓지 않으실까. 아마 그런 건 한탄의 한 축에도 못 낀다며 애들 두셋은 낳아야 들어줄만할까 쳐주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굳이 남의 불행과 나의 불행을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울이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만큼 좀 진지하게 우울해보려 하면 여러 가지 감정들로 방해를 받았다. 나는 몇 주째 이어지는 디멘터가 곧 사방에서 나올 것 같은 기분 나쁜 독일의 가을 날씨 속에서도 지나가는 길가에 참새 한 마리만 눈을 마주쳐도 귀여워 죽는다. 여러 가지 색이 섞인 꽃을 뵈면 갈수록 너무 신기하고, 아스팔트, 시멘트 바닥 틈새에 핀 민들레 꽃만 봐도 어떻게 그 틈 사이에서 살아내서 그 크고도 노란 꽃을 피워내는지도 대단해 보인다. 이제는 누가 받아 주든 받아 주지 않든 그래도 길 가다 눈이 마주치면 먼저 할로라고 인사를 하거나 눈인사를 해주고 싶고, 그러다 누구 한 명이라도 반갑게 맞인사를 나눠주면 그게 그렇게 달달한 고구마 하나를 먹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슬프고 화나고 답답하고 짜증 나는 일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나 세상에는 작은데도 귀엽고 예쁘고 맛있고 감사하고 감동적인 일들도 분명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몇 년 동안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삽질만 한 것 같고, 제대로 된 일은 찾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데도, 여전히 멀리에서도 나를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응원해 주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고, 생각해 보니 심지어 남편도 옆에 있어준 게 아닌가.


2년에 3번을 만났던 불안정했던 장거리 연애 시절부터 이제는 함께는 살고 있지만 내가 돈도 없고 직장도 없으며 과연 내가 언젠가는 독일에서의 삶을 적응하게 될 것이라던가 그렇다고 우리 둘이 모두 편안해하는 나라를 발견하고 거기에 우리 둘이 모두 일까지 할 수 있는 나라가 과연 있을까라는 질문까지.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한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나와 남편의 관계는 함께 보낸 시간과 비례하게 편안해진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장거리 연애 후 비자가 없는 상황에서 결혼 준비를 하고 혼인 신고를 하고 나자 코로나가 터졌고 코로나가 끝나고 나니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어찌 보면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뿐이었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였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니.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실 부부라면 당연히 함께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부부에게나 언제나 당연한 것은 없다. 일도 수입도 건강도 운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삶에서 어떨 때는 서로를 위해 상대를 위해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과 포기를 하는 것, 그것이 결혼 생활인가 싶었다. 이십 대 현장에서 만났던 아주머니들이 말씀하시던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있어줄 가족, 배우자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이런 의미였을까? 아주머니들의 그 말씀을 어렴풋이 떠올려보게 만들었던 그 신혼을 우리는 독일에서 보냈던 것이었다.


연애도 사랑도 공부와 일을 하는 것처럼 경험해야 하고 배워야 하며 이것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농담으로 내가 30대에 일하고 공부해야 하는 몫을 20대에 다 쏟아부은 것은 아니었을까 말했었는데, 어찌 보면 남들은 20대에 해봤을 연애와 사랑을 나는 30대가 되어서야 배우고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다독여보기로 했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고, 또 여전히 내가 지금 놓인 상황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을 미루는 이유는 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내 초라해 보이는 연말에도 감사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기뻤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떠나보냈던 2024년의 연말을 뒤로 하고, 결혼 생활 5년 만에 우리는 두 사람 모두 구직상태가 된 초유의 사건을 반년동안 보내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어디든 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던 즈음에 우리는 독일에서의 5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남편이 바라던 대로 정말 스위스에 오게 되었다. 그는 알았을까? 내가 스무 살이었던 때에 내 삼십 대에는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나라들에 살아보고 싶다고 상상했던 것을.


잘 사는 나라에 대한 정의는 누가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스위스는 남반구와 북반구 나라 사람들을 통틀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잘 사는 나라임은 분명해 보였다. 독일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바이에른 지역 사람들조차 우리가 스위스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그전에는 어디에 가는지에 따라 그런 곳을 왜 가니라는 반응을 하던 사람들조차, 어머 좋겠다는 말부터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스위스에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우리는 스위스에 주소 등록을 마쳤다. 스무 살의 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무척 신기해하며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궁금해하겠지. 물론 지금의 나도 궁금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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