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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비누나 Sep 09. 2024

미국 살기 싫은 16년 차 이민 인생

귀향하지 못하는 미주 동포의 허접한 삶 이야기 - 2008~2019 

귀향하지 못하는 미주 동포의 허접한 인생사  

내가 첫 미국 땅에 발을 디딘 건 지난 2008년이다. 당시엔 미국에 이민에 대한 거창한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예전 브런치 글에서 밝혔듯 단순히 교환학생 1년만 잘 보내자 싶었다. 그러고 한국에 돌아와 이래저래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우여곡절 1년이란 세월을 한국에서 재수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이렇게 허송세월 보내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마음에 빚을 져서라도 가고 싶었던 대학을 가자는 마음으로 뉴욕의 대학교에 다시 입학하면 안 되겠냐 이메일을 보냈다. 


이틀 뒤, 기적처럼 나의 포트폴리오를 1년 넘게 보관해 준 대학 입시처에서 이번 학기에 입학해도 된다는 소식에 급하게 뉴욕길에 올랐다. 유일하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응원해 주었던 할아버지가 사준 60만 원짜리 노트북 하나와 급하게 입을 옷 몇 개, 그리고 모아둔 돈에서 첫 학기 학비를 송금하고 몇 백만 원을 가지고 처음 뉴욕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했던 나는 당시 식사가 포함된 저렴한 브루클린의 홈스테이집에 600달러를 주고 들어갔다. 혼자 싱글맘으로 자식을 키우고 거주하시는 할머니가 방에 세를 놓는 곳에 들어가서 일단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학교까진 무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1시간 넘게 걸렸지만 당장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약 두 어달 간 살면서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뉴욕 사정을 듣고, 응원도 받으며 적응하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학교가 개강하기 1주일 전에 도착한 후 두어 달간 살다가 학교에서 너무 멀어 불편했던 홈스테이집을 뒤로하고 학교에서 전철로 40분이면 갈 수 있는 아스토리아에 두 번째 뉴욕 집을 찾았다. 이 당시에도 돈이 없어 저렴한 홈스테이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곳에 살던 헝가리 아줌마는 사사건건 시비는 물론 어린아이와 남편과 함께 한 방에서 생활하셨기 때문에 너무나 불편했다. 그곳에서 3개월 정도 살며 첫 대학생활 한 학기를 마쳐갈 때쯤, 학교 스트레스와 경제적인 스트레스 속에 집에서도 쉴 수 없는 내 생활에 지쳐 집을 찾던 중 운 좋게도 작은 원룸 스튜디오를 750달러에 찾게 되었다. 전철로 1시간 정도 걸렸지만, 걸어서 전철이 코 앞이었고 전기세나 수도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엌이 없어 불편했지만, 적당히 전기 플레이트로 요리를 할 수 있었고 혼자 살 수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 어떤 것도 따질 수 없었다. 이 원룸에 이사를 마칠 때엔 대학 첫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무릇 대학생활이라 하면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캠퍼스 라이프를 즐긴다 생각했겠지만 강도 높은 수업과 뉴욕 생활 적응, 그리고 집안의 도움이 크게 없이 혼자서 해결해야 되던 20대 초반인 나에겐 그런 사치는 부릴 수 없었다. 학교 성적을 잘 받고, 유학생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교내 아르바이트를 최대한 많이 하고, 이 외에 한국 회사에서 한국 통장으로 돈을 받을 수 있는 프리랜서 기자 및 블로거, 에디터로서의 일을 밤을 새 가며 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도 학교에서 일을 하고, 수업하고, 과제하고 돌아가던 길의 풍경 


내 기억에 당시 한국돈으로 100-120만 원을 매달 벌었는데, 그 돈은 모아서 다음 학기 학비로 내야 했고 교내 아르바이트로 매주 버는 돈이 300달러 언저리였는데 이걸 모아 내 한 달 렌트비, 식비, 전철비로 사용했다. 1200달러에 뉴욕 생활을 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정도로 적은 돈이었다. 2011년 정도의 이야기이니 벌써 13년 전 이야기지만 당시에도 뉴욕 생활비로는 아주 빠듯했다. 여름 내내 학교에서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2학기가 시작했다. 학교 생활은 내가 원하는 걸 배운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자질이 의심되는 교수도 많았다.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국에서는 교수가 테뉴어(tenure)를 받으면 살인 정도 일으키지 않으면 잘 릴일이 없다나 뭐라나. 다행히 1학기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에 나오는 날짜를 최소화하고 수업을 최대한으로 들었다. 최대한 크레디트를 받아 빨리 파트타임 학생으로 전환해 등록금을 적게 내고 싶었다. 


그리고 쉬는 날은 기사나 학교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래야 생활이 되었다. 생활비를 아껴야만 하는 나 같은 유학생은 없었고, 유일하게 비슷한 처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 유학생 동기와 뉴욕 출신 중국계 미국인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한국 유학생들은 모두 잘 사는 집안 자재들이라 그런지, 여러모로 내 재력으로는 도저히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을 다니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학교 주변 팁을 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저렴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나와 대학 동기들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행사엔 무조건 참여하고, 학교 휴지를 몰래 가져가는 절도까지 했으니 상당히 나쁜 대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정말 천 원에 궁하면, 어쩔 수 없어지곤 했다.


홍콩 교환학생 시절 밤 침사추이 야경. 


3학년이 되었을 땐, 학비는 똑같이 미국 학비를 내더라도 기숙사비가 무료로 제공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와 홍콩으로 이사 갔다. 쉬는 날 없이 항상 아르바이트만 하던 내가 당시에 간절히 원하던 건 좀 쉬는 거였다.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홍콩생활 6개월이 대학 생활 4년간 가장 즐거웠고 사진도 그 당시가 가장 많다. 월세와 비싼 생활비를 부담하고 살다가 홍콩 대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기숙사와 학식은 내겐 천국 같았다. 그리고 홍콩 친구들은 생각보다 훨씬 서민적이었고, 여러모로 나를 챙겨주었다. 그리고 옆 방을 같이 쓰던 스웨덴 교환학생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당시 나와 정말 성격이 잘 맞았던 스웨덴 친구와는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스웨덴에서 몇 번 봤을 정도이니 대학생활다운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끝나고, 뉴욕으로 돌아와 졸업준비를 하며 3년간 기를 쓰고 24학점을 채워 듣던 나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취업을 준비했다. 4년간 고생하며 살아와서 그런가, 온갖 인턴쉽이나 근무 경력은 많았다. 마지막 학기엔 파트타임이라 경제적 부담도 덜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55000달러의 연봉을 계약하고 오하이오에 있는 패션 브랜드 아베크롬비 & 피치에 들어갔다. 당시에 나에겐 큰돈이었고, 재밌는 사실은 뉴욕에서 입사제의를 받은 곳도 비슷한 연봉이었다. 나보다 일을 많이 해온 대학 선배들도 디자인 업계가 다 그렇듯 눈에 띄는 연봉을 받는 사람은 없었는데, 어떻게 뉴욕에서 생활이 되는지 정말 궁금했다. 나이가 더 들고 알게 되었지만 40살이 되어도 넉넉한 집에선 부모님들이 도와주시더라. 당시에 자세히는 몰랐지만 어렴풋이 부러웠고, 돈 많은 게 죄는 아니지만 처량한 내 처지가 불쌍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가본 적도 없는 오하이오 시골에 있는 대기업 신입으로 들어갔다.


백인들만 잔뜩 있던 아베크롬비는 브랜드 이미지답게, 오하이오의 시골마을답게 유색인종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오하이오 출신 백인들만 많던 회사에서 뉴욕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온 나는 그저 아시아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비자가 허락하는 1년간은 친구도, 지인도 없는 상태에서 보냈다. 당시 뉴욕에서 운전면허가 없던 나는 오하이오 출퇴근을 위해 운전면허를 급하게 따려 했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입사하고 나서도 무려 5개월이나 걸렸다. 그 사이 출퇴근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은 콜롬비아 출신 이민자 할머니와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전도사님 부부셨다. 나는 교회를 가지도 않고 지금도 종교를 믿지 않지만, 당시 나를 도와준 젊은 전도사님 부부는 나한테 있어선 하느님보다 감사한 존재였기에 지금도 가끔 연락이 닿으면 감사한 마음과 반가움이 앞서곤 한다. 그리고 콜롬비아 출신 할머니는 자신의 젊었을 시절 힘들고 기구했던 이민사를 추억하며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때 느낀 건 회사에서 재력과 직함을 내세우고 마치 공작새처럼 자랑 만들어놓던 백인들의 기만스러운 태도와 누군가 자신의 봉사심을 알아줄 때만 남을 돕는 모습을 보며 큰 혐오감을 느꼈었다. 


1년간 근무 후, 회사에서 신청해 준 미국 노동비자는 떨어졌고, 오히려 큰 안도감을 느꼈다. 드디어 한국에 갈 수 있다, 더 이상 미국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왔지만, 미국을 즐기기보다 하루하루 살아내고 다음날 길바닥에 나앉지 않길 바라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가고 자취를 했더라도 똑같이 힘들었겠지만, 내 처지와 비슷한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며 의지 했을 것 같다. 혼자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 나를 성장시키니 이런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그 당시에도 사이가 좋지 않던 부모님은 "밥 잘해먹고 잘 살더니 불평불만이 많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가끔 몇 안 되는 돈으로 동네 슈퍼마켓에 타임세일로 나온 식재료들로 직접 도시락을 싼 사진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부모님 외에도 내 친척들도 잘 먹고 잘 살면서 힘들다고 한다, 네가 원해서 간 것 아니냐는 말에 할 말이 없어져 그 이후론 일절 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일상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면 안 되고, 꼴불견이라는 말을 몇 번 듣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웬만하면 이런 속내를 잘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 노동비자가 떨어진 당시에 나는 기뻤지만, 이러한 감정도 일절 표현하지 않고 한국으로 모든 것을 처분하고 귀국했다.


한국에서는 취미활동 할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약 3년간, 이런저런 프리랜서 일을 하며 지냈다. 이 시기 항상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가족들과 절연을 하고, 나름의 불안함을 가지고 살았지만 동시에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처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저금'할 수 있어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20대 후반 불안한 미래와 상황 속에 살고 있었지만, 미국 생활에 비해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편안했고 훨씬 즐거웠다. 친한 친구랑 주말에 종종 산책하고 놀러 다니며 작은 내 자취방에서 저녁을 먹고 노는 것이 큰 낙이었고, 당시 동네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다른 친구와 가끔 보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끼리 근교 여행도 다니며, 정말 근 10년 만에 즐거웠다. 


당시 프리랜서로 하던 일은 내가 유학하며 전공한 일과는 달랐지만, 재택근무로 일할 수 있어 좋았고 대학 내내 힘들었던 내 기사, 리포트, 에디터 경력이 도움 되어 밥벌이할 수 있는 게 정말 감사했다. 서울에서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해도 됐겠지만, 그럴 심리적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익숙한 옛날 동네에서 살며 재택근무했던 이 시기가 나에겐 가장 안정적이었다. 


이 시기에도 불안함은 있었기에, 지금이었으면 한 달 살기라도 하면서 해외에 있었겠지만 당시 열심히 일만 하며 저금하는 재미로 지냈다. 이 시기도 3년 정도 지나고 나서 만나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프리랜서로 하던 일들이 매달 꾸준히 월급처럼 받는 안정적인 일이었지만, 매년 1월 개편이 되며 내 일이 사라지거나 하는 것도 빈번해 새로운 일자리를 메꾸거나 찾아야 했기에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고 싶었다. 또한 내가 그래도 4년간 고생하며 얻은 대학 졸업장을 활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다. 그래서 홧김에 결혼을 결정하고, 미국에 자리 잡고 있던 남자친구와 결혼해 미국으로 다시, 건너왔다. 


이번엔 미국에 대한 어떠한 목적, 로망, 새로움은 없이 낮은 기대감,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불안감,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신기한 느낌으로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급하게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친했던 친구들에게 내 생활 용품을 택배로 보내고, 혼자 김해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혼자 공항을 오고 간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과 눈물을 흘리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혼자 출국길에 올랐다. 그렇게 또 한 번, 작은 캐리온 가방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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