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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비누나 Sep 03. 2024

연봉 1억 주는 미국 꼰대 회사 7개월, 7명 퇴사

도망가고 싶지만 어정쩡한 일곱 달, 미국 꼰대 에피소드 

항상 시간의 흐름에 놀라곤 한다. 33년을 살면서도, 항상 하루는 길고 10년은 짧았다. 20살이던 날이 어제 같고, 10대의 기억은 어제의 기억보다 진하다. 지금도 내 마음과 기억은 15살인데, 내 나이는 벌써 두 배나 더 먹었다. 무려 4월에 마지막 글을 쓰고 베트남, 캄보디아, 한국으로 떠났던 나는 6월에 미국으로 복귀해 정신없이 다니던 꼰대 회사에 적응해서 하루를 살아내다 보니 벌써 9월이다. 더운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고, 아직 내 코 끝엔 캄보디아 공기에 섞여 있던 흙냄새가 남아있다. 내일 9월의 첫 출근날이다. 오늘은 미국 노동절로 월요일을 편안하게 쉬었더니, 문득 이 회사를 개월수로는 7개월이나 다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물론 중간에 여행을 다녀온다고 한 달 반 이상 쉬었으니, 실제로 회사를 다닌 건 5개월 반 정도이지만.


소소한 소비로 즐거움

현재 다니고 있는 미국의 대기업이자 시카고 근교, 일리노이주 외곽에 있는 이 회사는 들어갈 때부터 꼰대스러운 분위기에 다소 적응이 안 되어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인간의 적응의 동물이고 나는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온 인간이라 그런가 적당히 눈감고 회사를 다니고 있다. 여전히 해당 회사의 문화, 체계, 동료들 그 어느 것도 익숙해진 건 없다. 하지만 그동안 나름 신기하다 생각했던 점과, 나름의 장점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먼저, 신기했던 점은 미국인들 - 정확히 말하면 백인이 85% 이상 다수이고 15% 정도의 유색인종, 이 중에서도 아시아인들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22조 원 규모의 미국 최대 의료기기 회사. 이렇게 미국인들로 구성된 회사 속 문화가 정말 한국 꼰대 회사 뺨치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기록해 본다.


첫 번째로는, 저녁 7시 - 10시, 회사 팀원 모두가 초대되는 저녁 회식이 많다. 놀라운 건 참석률도 높다는 점. 복귀하고 벌써 3번(매주 1회 정도), 5시에 퇴근하고 다 같이 카풀해서 가자고 하니 회사 8시 출근부터 밤 10시까지 팀원들과 함께 있다. 더 놀라운 건 아이나 가정이 있는 직원들도 많다. 더더더 놀라운 건 아무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아서, 기존에 다니던 미국회사 분위기와 매우 달라 놀랍다. 기존 다니던 비슷한 대기업 규모는 아이, 가정이 있다고 딱 잘라서 젊은 싱글 직원 아니고서는 아무도 가지 않아 빠지는데 눈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다니는 회사는 가정에 어린아이가 있는 매니저들도 베이비시터를 구하거나 배우자에게 급하게 전화해서라도 나오는 그런 술자리가 잦다. 게다가 업무를 오래, 많이 하는 걸 아주 인정해 주고 좋아한다. 나처럼 업무를 열심히 하고, 칼퇴하는 사람을 다소 안 좋게 보는 듯해서 적당히 분위기 맞춰 회식에 나가지만 이 비용은 또 칼같이 더치페이를 하니 정말 나가기 싫다. 미국에서 연봉 1억이 넘는 내 월급은 매우 작은 편에 속하는데, 돈을 훨씬 많이 받는 매니저급들과 같이 술 마시는 것도 불편한데 비용도 나가니 정말 별로다. 적당히 맞춰주며 회사에서 모난 돌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나가지만, 빨리 겨울이 와서 회식이 줄었으면 한다. 


뉴욕 출장 공항에서 라운지 식사 


두 번째로 출장이 잦다. 이 회사에서 7개월간 근무하며 벌써 멕시코, 뉴욕 출장에 이어 곧 노스캘로라이나, 케냐 출장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행기 시간이 퇴근 후 출발, 출근 전 도착이라는 미친 스케줄을 짜준다. 기존 회사를 포함해 미국 회사에선 출장 출도착 시간을 특별한 이유 아니고선 근무시간에 맞춰 여행한다. 출장지에 오고 가는 시간도 전부 근무의 일 부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일찍 출발하는 경우가 있음 보통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등 한국에서도 유연한 편인 회사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여긴 아니다. 왜 이렇게 하냐니까 다른 동료들이 그냥 회사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미국 대기업 맞는지 정말 의구심이 들었다. 복지, 연봉, 그 어느 부분에서도 좋은 편이 아니며 시스템적으로도 무척 뒤떨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회사를 위해 헌신하는 직원들 분위기에 아직도 적응이 어렵다. 


세 번째로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것도 있고, 어딜 가나 새로운 데에서 아무리 최악의 시스템이라도 배울 건 있다고 생각해서 여러모로 내가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덕분에 매니저와 팀원이 6주 한국+동남아 여행 후 귀국하니 아주 환대해 주고 기뻐하며 특히 나를 힘들게 했던 마이크로매니징하던 동료가 그간 내가 없어 힘들었던 점을 말하며 자기를 미팅에서 서포트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 왔다. 그래서 이 동료가 서포트 부탁한 부분을 디렉터와 조심스럽게 이야기 나눴는데, 디렉터가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있어서 쇼크였다. 디렉터 왈 "파키스탄 출장 갔다 와서부터 기억이 혼미하다"라길래 이야기를 나눠보니, 무려 회사 경비를 아껴주려고 이코노미를 타고 장기 출장을 다녀왔다고 한다. 회사 규정에도 비즈니스를 탈 수 있는데, 회사 분위기 상 나서서 경비를 아껴주는 모습이 황당했다. 돈, 복지 어디에 내놓아도 뒤쳐지는데 직업을 가진 것 자체로 감사하는 듯한 동료들을 보며 왜 업계에서 실력이 떨어지고 이직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이상한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같은 팀원 내 50% 이상이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입사해 다른 회사의 시스템을 전혀 만나본 적이 없고, 나머지 50%는 수많은 회사를 거쳐 리더십 레벨로 이직해 와 황당한 회사 시스템을 배우는데 급급해 보인다. 중간 관리자가 없는, 허리가 없는 회사의 가장 큰 단점은 배울 점이 있는 동료가 없다는 것이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지막으로 복귀하고 4월 한 달 사이 4명이 퇴사하고 5명이 채용되어 또 정신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여름 인턴들이 여럿 들어왔는데 인턴 중 한 명이 참 일도 열심히 하고 착하고 중국계 미국인(입양된 친구)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 친구가 '회사가 다 이런 거냐,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일하냐'라고 실망하는 모습이 보였다. 20대 초반의 대학생을 좋게 좋게 다독여주면서도, 회사 생활이란 게 다 이런 거지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 답답했다. 어린 친구들이 회사에 들어와서 쇼크 받고 힘들어하는 거 보면 그냥 솔직하게 회사는 들어가 보기 전엔 모르고 적당히 조용히 다니다 안 맞음 빠르게 이직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이야기해 주기엔 너무 과격한가 고민되었다. 


돈도 못 벌고 스트레스만 많이 받는 나는 항상 트실트실한 상태 


그리고 8월, 내 앞자리에 앉았던 다른 팀 매니저와 세 번째 포인트에서 이야기 나눴던 디렉터가 이 회사에서 2년을 채우자마자 급 퇴사 선언을 하시고 조기 은퇴를 발표했다. 보통 미국 회사에서는 이사 비용이나 계약 기간으로 2년을 잡는 경우가 많아, 2년을 채우자마자 도망 나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4월 복귀 후 나간 직원과 현재 9월 초 기준 숫자는 더 늘어나 셀 수 있는 것만 7명이 퇴사했다. 겨우 1-2년을 채우고 나가는 이 회사의 단점을 나만 느끼는 건 아니구나라고 위안을 받는다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디렉터님은 퇴사하기 전, 나와 1:1 면담에서 "이 회사에서 전문가가 많이 없고 모두들 자기 방식대로만 일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네가 가장 전문가다. 적극적으로 본인 의견 어필과 업무를 밀고 가라."라고 조언해 주고 나가셨다. 좋은 말씀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몰려드는 잔잔바리 업무 쳐내는데 정신이 없다. 그리고 회사 내 승진 및 보너스 체계를 봐도, 내가 나서서 시스템을 개선시킨다고 해서 떨어질 콩고물도 없고 오히려 욕받이만 될 것 같아 쏟아지는 일상 쓸데없는 업무를 청소하는 느낌으로 다니고 있다.


현 회사를 7개월 다니며, 업무적으로 오히려 능력이 도태되는 것 같은 갈라파고스 형태의 업무 처리방식에 열심히 이력서를 뿌리고 있다. 업계에서 듣도 보도 못한 벤더 맞춰주기식 업무나, 나의 직함과 1도 상관없는 업무들이 쏟아지는 것이나, 손바닥 뒤집듯이 업무 방식이 계속해서 바뀌는데 리더십이 부족한 40살의 매니저는 이랬다 저랬다 식의 지시로 일을 두세 번 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나이차이 많이 나지 않는 상사도 맞춰줘야 하니, 항상 적당히 회사 다니자고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물경력이 되지 않도록, 배울 건 배우고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기도하고 있다. 요새 미국도 경기 안 좋아서 그런가, 작년 이직시기와 비해 인터뷰 요청이 적다. 어쨌든 이력서 상에서는 1년 정도의 경력은 되어야 리쿠르터들의 연락이 자주 오지 않을까 싶다. 항상 탈출을 꿈꾸는 미국의 직장인, 나도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미국 꿈의 직장에 다니고 싶다. 내 꿈의 직장은 스트레스받지 않고, 일도 많이 안 힘들고,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이면 충분한데 이게 정말 신기루 같은 존재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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