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손절의 역사 - 친구와 절교해요
보통의 인간관계가 다 그렇듯이, 언제 어디에서 무슨 관계로 만나서 어떻게 사이가 깊어지냐에 따라 기본적인 매너나 본인의 위치가 정해진다. 그리고 그 선을 넘기 시작하면, 기분이 나빠지거나, 사이가 깊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각각의 성향에 따라 서로를 경계하거나 잘 지내거나 한다. 보통 사람들은 기버이거나 테이커인 경우가 많은데, 나는 기버의 성향이 강한 편. 테이커이고 싶으나, 기본적으로 나는 정보든 물건이든 나누면 더 좋고 다 함께 잘 지내며 내가 감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 사람들이 원하는 선에서 최대한 주려고 한다. 이 기버의 성향은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아마 타고난 태생이 K-장녀로서 양보하고 나눠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가까운 사람이면 내가 크게 힘들지 않다면 잘해주고 싶다. 반대로 가까운 사람이 내게 잘해주면 난 그 고마운 기억이 5년이고 10년이고 마음에 남아 언젠가 은혜를 꼭 돌려주겠다(?)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나이 들며 느낀 건데, 태생이 테이커로서 누군가의 챙김이나 돌봄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성향은 본인이 장녀, 막내 상관없이 타고 나는 설정인가 싶을 정도로 두루두루 많은 사람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다 나 같진 않네라는 건 나이가 들며 안타깝게도 경험으로 체득했다.
학창 시절에 테이커 기질의 친구를 만나면, 그냥 저 친구가 좀 이기적인듯하다, 용돈이 모자라서 저러나? 정도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성인이 된 사람들을 만나니 점점 교묘하고 본인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 기를 쓰며 맞춰주는 사람들의 호의를 맥시멈으로 뽑아내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이런 부분은 친구관계에서도 점점 더 눈에 띄었는데, 미국에 와서 생활하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보았을 때도 비슷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기버들은 항상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는데, 30대가 되고 돌아보면 기버들도 많이 뺏기고 손해를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애초에 그런 싹이 보이는 사람들은 미리 거리를 두거나 관계를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방법을 터득하고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버들은 결국 기버들과 친하게 똘똘 뭉치게 되더라.
최근에 30대 중반에 들어서고 나서 느낀 점은, 대부분의 나이 든 테이커들은 대놓고 무언가를 달라고 하진 않았다. 테이커들도 나이 들고 어릴 때처럼 기버들에게 달라고 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으니,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무능함을 무기로 삼아 일을 시키거나, 기버들이 약한 부분을 건드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형태로 발전된 케이스를 많이 경험했다. 내가 이런 건 잘 못해서, 내가 어떠한 아픔이나 병이 있어서, 나는 삶이 불행해서, 나는 이러한 아픔이 있어서 등등 본인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하며 동정표를 사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는 걸 얻어냈다.
못한다는 것을 무기 삼아 아주 작은 일조차도 떠넘기려는 행동도 자주 보였다. 내가 어떠한 어려움이 있으니 네가 돈을 빌려주던지 일이라도 해주던지 같은 이야기를 하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은 측은지심의 마음이 들며 순수하게 도움을 주게 된다. 근데 막상 도와주고 나면, 고마워하는 척하다가 잊어버리고 본인의 이기심을 드러내며 도와준 사람들을 실망스럽게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예를 들어, 테이커 A는 회사에서 본인의 가족이 아프고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회사에서 벌이가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쌈짓돈을 털어 모금해 줬더니 몇 달 후에 새 차를 뽑고 나타났다. 그러고 A는 "아, 내 차가 고장 나서 새 차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서"라며 누가 봐도 본인이 이야기한 경제상황과는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도와준 사람들을 바보취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차가 필요하면 사는 게 맞지만, 회사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보다 훨씬 비싼 신차를 뽑는 A의 행동은 모금을 해준 사람들로 하여금 '내 돈으로 아픈 가족 치료한 건 맞나? 보험금처리하고 우리가 모아준 돈으로는 본인 돈으로는 새 차를 뽑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도와준 많은 동료들의 실망감은 이로말로 할 수 없었다.
테이커 B는 자기를 아주 열심히 살며 하루하루 노력하는 성실형으로 포장한 뒤, 주변사람들이 도와주는 손길을 계속에서 받아가지만 뒤에서 그 사람들의 도움을 "뭐, 도와주면 고맙게 받지만 내가 굳이 해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이런 식으로 폄하했다. 본인 주변에 있는 기버 친구들이 다소 투박하게 도와주더라도, 어려울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말투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아가 계속해서 돈을 빌리며, 본인의 노력이 모자라서 갚을 수 없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듯한 연기를 하지만, 실제로 가까이서 지켜보면 아침에는 스타벅스 커피 및 배달 어플로 아침을 시켜 먹고, 귀찮으니 디저트도 배달해 먹고, 저녁에는 고생한 스스로를 위해 고기 뷔페, 주말엔 힐링을 위한 여행까지 다니는 모습을 보며 굉장히 쇼크를 받은 적도 있다. 본인이 좋아하는 '최애'를 위해서라면 굿즈 구매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고 한들, 빌린 돈이 한두 푼이 아닌데 이런 흥청망청 씀씀이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본인만 중요하고, 말하는 것처럼 빌린 돈에 대해 신경 쓰진 않는구나 싶었다. 그 돈을 빌려준 이들 중에선 배달 음식을 참고, 취미 생활도 참아 모은 돈을 빌려 준 사람도 있을 텐데.
돈이든 감정이든 빌려주거나 주고 나면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테이커들이 본인의 상황을 엄청나게 불쌍하게, 스스로를 착하게 포장 한 뒤 막상 하는 행동은 당장 본인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것에 속아 넘어간 나 자신을 또 한 번 자책한다.
이 외에도 테이커들의 역사를 써 내려가면 아마 알파벳 Z까지 사용해도 모자라겠다. 하지만 브런치에 다 쓰려면 장편 소설이 될 것 같으니, 조용히 삼키도록 하겠다. 저런 테이커 친구나 지인들과는 전부 '손절', 절교를 계속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내 주변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친구들만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친구들도 모두 기버에 가까운 성향으로 비슷하게 테이커들과 손절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번은 기버 성향의 친한 친구와 함께 알던, 이제는 절교한 테이커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착하게 사는 게 바보 아냐? 이기적이라 해도 나 자신은 내가 보살피고 자존감 높여야지."라는 말에 황당하였던 상황. 그래, 요즘 세상엔 착하게 사는 게 손해고 인간관계에서도 손해겠지. 나도 나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고 싶은데, 어쩌겠냐. 이렇게 태어난걸. 남한테 피해 끼치면서도 나 스스로가 더 중요하다고 하기엔 지금 내 삶이 너무 여유로워, 그렇겐 못하겠다. 이렇게 오늘도 30대인 나는 정신 승리를 하며 남의 호의를 둘리로 취급하지 않아야겠다 스스로 채찍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