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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Mar 19. 2022

우리가 바라던 희망의 얼굴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웨이브 드라마 추천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하 <악마음>)은 제작과 편성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기사와 영화, 예능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연쇄살인 사건들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시청자가 결말을 알고 있을뿐더러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질려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는 막연하게 '또 다른 연쇄살인범 드라마가 나오는구나'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여느 형사 드라마와 다르다고 느끼며 점점 빠져들었다. 악의 마음을 읽어내는 과정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선한 의지를 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왼쪽) 범죄행동분석팀 국영수와 송하영 (오른쪽) 기동수사대 윤태구와 남일영


<악마음>은 <그것이 알고 싶다> 자문위원으로 널리 알려진 권일용 프로파일러와, 그와 함께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링 팀을 꾸려 일했던 윤외출 경무관이라는 실존인물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원작인 동명의 책을 권일용 프로파일러가 기자와 함께 썼다.) 극중 김남길이 연기하는 송하영은 권일용 프로파일러에서, 진선규가 연기하는 국영수는 윤외출 경무관에서 따온 캐릭터다. 두 배우의 연기가 ‘미쳤다’는 것은 드라마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지만 이 글에서는 중요하지 않으니 차치하고 <악마음>은 범죄자가 아닌, 범죄자를 검거해 더 많은 범죄를 막으려는 경찰에게 집중한다.


국영수과 송하영이 처음부터 한 팀이었던 것은 아니다. 평범한 형사였던 송하영에게 베테랑 감식관이었던 국영수가 접근해, 프로파일링팀을 만들 것이니 합류해달라 제안한다. 미국 FBI처럼 우리나라도 연쇄살인범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영수는 어렵사리 윗분들과 송하영을 설득해 결국 범죄행동분석팀을 만든다. 하지만 범죄행동분석팀의 첫 상대는 연쇄살인범이 아니었다. 내부의 적, 경찰이라는 조직의 방어적인 태도였다. 90년대는 범인은 다리 열심히 움직여서 잡는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건 현장과 그 일대를 쥐잡듯 수색하는 행동파 수사가 대세였다. 그들에게 책상에 앉아 정리한 자료로,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범인이 30대 남성이며 소심해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프로파일러의 말은 월권과 가소로운 말처럼 보인다. “이거 뭐 심리 테스트랑 비슷한 건가?” 같은 말로 비아냥대기 일쑤다.

초반에는 멸시를 받았지만 결국 공을 인정받아 팀이 유지되고 범죄자 면담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송하영과 국영수는 지지 않고 기동수사대를 열심히 설득하고, 기동수사대와 범죄행동분석팀의 갈등으로 골 아파하는 윗분들에게 기회를 달라며 애원하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한다. 와중에 수사에서 프로파일링이 큰 역할을 해 중요한 사건을 해결한다. 결국 경찰은 범죄행동분석팀을 한두 해마다 연장시켜주고, 두 사람은 수감된 연쇄살인범을 면담하며 한국형 사이코패스의 행동방식을 정리해나가며 2000년대를 맞이한다.


그러던 어느 날(5회), 연쇄살인범을 면담하고 나오는 길에 라이터를 만지작대는 국영수를 보고 송하영이 묻는다. 금연했다면서 왜 라이터를 들고 다니냐고. 국영수는 답한다. “언젠가 한번은 피울 날이 올 것 같아서. 그런데 그때 라이터가 없어 피우지 못한다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이후 국영수는 라이터를 두 번 사용한다. 첫 번째는 해외에 사는 가족으로부터 생일 축하 전화를 받는 장면, 두 번째는 여러 구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 일하느라 자기 생일인 줄도 모르고 집에 들어온 밤,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가족이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데 끌 촛불이 없자 국영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라이터 불을 불어 끈다. 이후 결국 한 사람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담뱃불을 붙이게 되지만, 드라마는 가족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통해 국영수와 송하영이 미칠 것 같은 순간을 견디면서까지 범죄행동분석을 계속하는 이유와 원동력을 보여준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 말이다.


바로 이 다음 장면에서 국영수가 담뱃불을 붙인다


국영수가 품에 갖고 다니는 것이 사직서가 아닌 라이터라는 점은, 설사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그만두지는 않으리라는 결심을 보여준다. 국영수는 자주 동료에게 실없는 농담을 하고, 힘든 날에는 곱창과 술을 권하고 마신다. 라이터, 술, 농담. 어느 누구도 해하지 않는 것들로 자신을 달래며, 오로지 쾌감을 위해 살인하는 살인범을 대한다. 송하영은 더 지독하고 더 전투적이다. 담배도, 술도, 농담도 즐기지 않는다. 송하영이 위태로워질 때에는 국영수가 농담을 던지거나 회식에 끌고 가거나 진지한 얼굴로 괜찮냐고 묻는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그만하자거나 그만해도 된다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그나마 하는 말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정도. 내일이 되면 국영수와 송하영은 괴로운 얼굴로 다시 사건 기록을 살피고 살인범을 면담한다.


그러던 송하영도 악이 악한 줄조차 모르는 살인범을 만나고 난 후, 처음으로 흔들린다. 국영수에게 왜 하필 자신에게 프로파일링을 권했냐고 따져 묻는다. 국영수는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는다. “왜 하필 너였는지 미안한 맘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난 다시 돌아가도 널 선택할 거야.” 실제로 윤외출 경무관은 300명이 넘는 형사 기록을 살핀 후 가장 적합해 보이는 권일용 프로파일러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폼나서 범죄행동분석팀에 들어왔다는 막내 '우쭈쭈' 정우주에게 송하영이 들려준 '장님(드라마에서 사용된 용어에 따라 시각장애인 대신 장님이라는 용어를 쓴다)'과 등불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다. 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걷는 장님한테 누가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왜 들고 걷냐'고 물었다. 장님은 '다른 사람들이 그 등불을 보고 부딪혀 넘어지지 말라고'라고 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길을 밝히는 것이다. 형사는 그런 마음으로 범죄를 맞닦뜨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악마음>은 수많은 범죄를 마주하면서도 사건을 해결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아니 그건 너무 멀고 당장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프로파일러와 형사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 과정은 너무나 고단하고 자주 절망적이지만 버틴다. 그리고 버티는 시간만큼 사건을 해결한다.


(왼쪽부터) 범죄행동분석팀의 정우주, 송하영, 국영수


우리는 으레 희망을 미래를 낙관하는 기질로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희망은 오히려 현실에 기반한 사고방식에 가깝다.1)  희망적인 사람들은 현실에 드러난 것 말고도 그 안에 ‘잠재’된 것을 보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들은 그에 기반해 구체적인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하나씩 해나가며 희망을 보았다. 국영수가 300명이 넘는 인사기록을 보면서 송하영을 찾아낸 것처럼. 송하영이 매일같이 사건현장에 나가 범인을 탐구한 것처럼. 윤태구가 일상적인 여성혐오를 견디고 경찰의 일을 다해온 것처럼. 결국 희망은 훈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비단 연쇄살인과 같은 거대한 악의에 국한된 말은 아닐 것이다. 쉽게 혐오하는 마음과 같이 미세공기처럼 퍼져 있는 일상의 작은 악의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어벤저스 같은 슈퍼히어로나 모든 사건을 해결해내는 먼치킨류의 탐정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자주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선의도 너무 무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도 히어로는 있다. 어딘가에서 아주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음먹기에 따라 내가 될 수도 있다.


범죄 장면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악마음>을 온전히 옹호할 수만은 없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가해자의 시선을 재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사람을 죽이며 쾌감을 느끼는 가해자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음>을 응원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내가 바라던 선의와 희망의 모습을 송하영과 국영수, 윤태구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 악의에 대한 분노를 땔감 삼아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의 찌든 얼굴에서 나는 희망을 읽어낸다.


본격 희망 착즙 드라마,,, (아님)



1) 참고: https://aeon.co/essays/true-hope-takes-a-hard-look-at-reality-then-makes-a-plan

이미지 출처: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공식홈페이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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