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을 버리며 이것을 취하자
동양철학 분야서 잘 알려진 최진석 교수가 EBS서 강연한 노자강의를 엮은 책이다.
사상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먼저 고대 중국은 세상의 정당성을 하늘에서 찾던 천명론이 득세 하였다. 주나라 말 철기의 발명에서 비롯된 생산수단의 변화는 계급사회와 정치구조에 영향을 끼쳐 지방 제후들이 득세하게 되고 천자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춘추전국 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천하무도한 혼란스런 상황에서 천명론을 극복해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고 했던 최초의 철학자로 노자와 공자가 등장하게 된다. 둘의 영감의 원천은 달랐는데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인간 내면에서 영감을 얻고, 노자는 자연의 질서를 근거로 삼았다.
저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도덕경 제1장 첫 구절이라고 하여,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본질 자체를 부정하고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알아낸 관계성, 노자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노자가 파악한 세계의 관계성은 '유' 와 '무' 라고 하는 대립면의 상호관계에 있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유무의 대립과 긴장 위에서 벌어진다는게 제1장의 내용이라고 한다.
제2장에 나오는 유무상생은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준다' 로 해석된다. 유가 유인 이유는 유 자체에 있는 어떤 특정한 성질이 아니라 무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유가 되고, 마찬가지로 무도 무 자체에 있는 어떤 특정한 성질 때문이 아니라 유와의 관계 속에서 무가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도' 는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는 형식 내지는 운행의 원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서양철학에서 실체 속에서 본질을 찾는 '본질론' 과는 다른 입장으로 보여진다.
어떤 본질을 두고 좋다 혹은 나쁘다 주관적 판단을 하는 것과 달리, 도덕경에선 어떤 가치론적 장치도 개입되지 않은 '무위' 를 지향한다. 가령 '사랑' 에는 반드시 그것을 '사랑' 이게 해주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기 보다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어떤 관계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개념적인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있는 반면 설명 안되는 것의 경우에는 관계론적으로 보면 더 명료해지는 경우가 있는거 같다.
노자의 사상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행위는 바로 '도' 를 근거로 하거나 도를 본받아서 하는 행위인데, 이런 '도' 에 대해 '황홀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라고 말하면서 아래의 글을 통해 도가 존재하는 형식을 얘기한다.
'홀하고 황하구나! 그 안에 형상이 있다. 황하고 홀하구나!
그 안에 실정이 있다'
황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흐릿해진 상태이고 홀은 어둠 속에 있어서 흐릿해진 경우이다. 이 두글자의 의미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밝음과 어둠을 교차시키는 수사법을 통해 '미묘하고 흐릿함' 이 밝음과 어둠의 교차로 표현하려는 의도, 즉 세계가 대립면의 꼬임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세계가 본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고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곧 '도' 이다.
도에 따라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도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봐야한다. 이처럼 단순히 知 에 그치지 않고 상호연관 속에서 바라보는 노자의 통찰을 明 이라고 한다.
현대과학의 양자역학만 보더라도 입자는 입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측정해야 그 존재가 드러난다. 즉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관계를 형성하기에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전체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 우주는 양자적으로 연결된 단일체라는주장도 펼쳐지고 있다. 큰 맥락에서 보면 노자의 통찰법이 현대 양자역학과도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도 든다.
노자 사상의 기본 구도는 이 세계가 두 대립면의 꼬임으로 되어있다는 유무상생에서 비롯되어 도덕경 제39장에는,
'옛날부터 하나를 얻어서 된 것들이 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다.
땅은 하나를 얻어서 안정된다.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험하고
계곡은 하나를 얻어서 채워지며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살고
통치자는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올바르게 한다.'
이 '하나'를 네글자로 풀어 말하면 유무상생으로 즉 옛날부터 이 세계는 대립면의 경계라는 원칙을 지키기 때문에 제대로 유지된다고 말한다. 이것도 풀어보면
'하늘이 끊임없이 청명하려고만 하면 장차 무너져내릴 것이고
땅이 끊임없이 안정을 유지하려고만 하면 장차 쪼개질 것이며
신이 끊임없이 영험하려고만 하면 장차 사라지게 될 것이고
계곡이 끊임없이 꽉 채우려고만 들면 장차 말라버릴 것이며
만물이 끊임없이 살려고만 하면 장차 소멸하게 될 것이고
통치자가 끊임없이 고귀하고 높게만 행세하려 들면 장차 실각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유지는 대립면의 긴장 속 상호균형 하에 잘 이어가지만, 불균형이나 치우침은 파국을 일으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너무 맑은 말에 고기가 못 산다는 말이 있듯이 자연의 이치는 뭐든 과하기 보다 조화가 중요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유무상생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무위' 라고 하는데,
'옛날에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미묘하고 현통하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기 떄문에 억지로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뿐이다.
조심조심하는구나! 마치 살얼음 낀 겨울 내를 건너는 듯이 한다.'
대립면의 꼬임이라는 우주의 존재형식을 내면화한 사람은, 무언가에 과감하게 확신을 갖기보다 코끼리가 겨울 개천을 건너듯 신중하고 조심스럽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쁜 말로 하면 줏대없고 흐리멍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특정한 신념이나 이념에 지배되지 않고 유연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떤 기준이나 이념도 결국 관념에서나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 세상은 계속 바뀐다. 옛 관념에 얽매이기 보다 변화하는 진실에 잘 적응하라는 얘기인거 같다.
그래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는 생각은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이다. 즉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지 않고 '봐야하는 대로' 보면 과거에 묶여 진실을 못보게 된다. 현재 전국민을 혼란에 빠뜨린 부동산 정책도 구닥다리 신념으로 시장을 바라보니 투기꾼이라는 관념 속의 적을 상정하여 좇아 헤매다가 전문가들의 목소리 마저 외면한 채 파탄에 이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선민의식에 빠져있다 보니, 역사에 대한 해석 마저도 선과 악을 규정지어 법이라는 틀에 가둬버리려 한다. 역사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는 것이지 법으로 못박아 비판의 목소리 마저 일축하는 것은 강요이자 폭력이다.
저자는 노자의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보편적 이념이나 가치를 벗어나 자발성을 강조하며,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존재하라' 고 주장한다. 좋은 것은 항상 저기에 있다거나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가치 기준에 개인을 우겨 넣고 평가하다보면 스스로를 보잘 것 없게 만드는 꼴이고, 자괴감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존재 의미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다. 사람은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고 각자가 유일한 존재이기에 행복의 기준도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튼 요즘같이 다변화 되가는 현대사회에서는 공자의 '극기복례' 보다 노자의 '거피취자' 가 필요되는 삶의 지혜인 것 같다.
'거피취자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며 바람직한 것을 버리고 바라는 것을 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