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슬머리@흰머리
"빨강머리 앤" 책 제목을 스치며
이른 새벽 책꽂이를 휘둘러보다가 오래전에 봤던 "빨강머리 앤"이란 소설책이 눈에 띄니 문득 감회가 생긴다.
나는 태생적으로 악성 곱슬머리였다. 엄마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아침잠에서 깨어나 거울에 비친 내 머리칼을 보고 있으면 불이라도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살면서 한두 번이 아니었다. 푸시시 까치둥지 같은 머리칼이 불 쏘기 개 하면 딱일 듯싶었으니. 반들반들 비구니 머리 되면 오히려 시원하고 정신 번쩍 들 텐데 하며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무슨 저주를 받아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몰골로 태어났는지 늘 불만에 우울하고 짜증 투성이다.
아주 어린 학생 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챙겨 먹는 것보다 급선무가 머리부터 꽁꽁 묶는 일이다.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다. 마치 머리를 잘 묶는 것이 정신줄 단단히 붙들어 매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업 중에도 보시 시 일어서는 머리카락이 손에 잡히면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 달려가 머리카락에 물을 묻혀 꾹꾹 눌러 주며 단정하게 정리한다. 잠시 잠깐이다. 이 곱슬머리는 눌러도 눌러도 끝없이 부풀러 오르며 기어오르는 왕성한 끈기와 인내력을 가지고 있다. 옷은 나름대로 스타일 컬러 잘 맞춰 입으면 맵시가 나는데 헤어스타일은 도저히 방도가 없다.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선호하는 나는 악성 곱슬머리에서 스타일이 산산이 부서지며 좌절한다.
내가 10대 소녀일 적에는 매직 스트라이트 파마도 없던 시절이다. 30대가 되었을 때 헤어디자이너들의 현란한 입담에 넘어가 매직 파마 몇 번 시도해봤다. 찰랑찰랑 생머리 느낌이 너무 좋아 거울을 비추고 또 비춰 보며 너무 좋아서 난리법석 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꿈에서도 꾸며보고 싶던 깔끔한 헤어스타일을 현대 기술의 힘을 입어 소원 성취했다. 야호, 신났다.
매직 파마 한 번의 유효기간은 20일 좌우다. 그 시일이 지나면 뿌리에서 붕붕 치고 올라오는 곱슬머리의 위력이 슬슬 내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몇 번 시도해보니 이내 질리고 귀찮아졌다. 그냥 하던 대로 짧은 머리 커트하는 게 최선이다.
30대 후반 어느 날부턴가 설상가상 새치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40대 초반부터는 하얗게 흰머리투성이가 되었다. 가족 내력이었다. 엄마랑 남동생은 30대 후반에 몽땅 하얘졌다. 그나마 나는 검은 머리 섞여서 회색이 어디냐는 가족들의 말이 위안인지 뭔지 그다지 맘에 와 닿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번 무조건 염색이다. 사람이 무인도에 살지 않는 이상 사회성의 존재인만큼 사람들의 이목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꾸역꾸역 10여 년을 흰머리 염색하며 낑낑 씨름했다.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작년부터 큰 마음먹고 바꾸기로 결심했다. 흰머리 염색 관두기로 했다. 지천명 50대 관문을 넘어서니 용기도 생겼다. 생긴 대로 자연스럽게 살자. 비록 악성 곱슬에 흰머리지만 머리숱이 많은 건 또 감사할 일이라 마음 고쳐 먹으니 한결 편안해졌다. 생각은 한 끗 차이였다.
이제는 커트만 하면 된다. 곱슬@흰머리 그대로 거리를 활보한다. 가끔씩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못 말리는 오지랖 아주머니들이 호기심을 주체 못 하고 물어온다.
" 혹시 탈색하신 건가요? 얼굴 봐선 연세가 너무 있으신 분 같진 않으신대..."
"아...... 자연산이네요."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어제는 미용실에서 커트를 해주던 헤어디자이너 말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릴 때는 헤어가 장난 아니게 스트레스였겠어요. 지금은 오히려 굳이 웨이브 넣을 필요 없이 너무 자연스러워 깔끔하게 정리만 잘해 주면 되니 참 좋으세요."
그게 바로 내 생각이기도 하다. 나이 드니 생머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다들 파마하며 웨이브 넣어야만 하는데 내 헤어는 자연산 그대로 고불고불 파마한 듯이 충분하니 지겹던 곱슬이 음지에서 양지로 오게 되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드라마 대사 뱉듯이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단지 생각하기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셰익스피어의 말이 딱하고 떠오른다.
살면서 내가 악성 곱슬머리에 감사하게 되다니. 친구들이 요즘 흰머리는 개성이고 패션이라고 격려해 주니 기분 또한 나쁘지 않다. 이 나이 먹도록 화려함과는 담을 쌓고 사는 나답게 심플함과 내추럴한 스타일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자기 기분이 우선이다. 남의 시선, 이목에서 살짝 자유로워진 나이 듦과 마음의 여유가 좋다.
내 마음 가는 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요즘의 내 모습이 스스로도 흐뭇하다. 꽈배기 하지도 억지 부리지도 않는 삶의 패턴이 좋다. 연륜에서 절로 묻어 나오는 느긋함과 베짱이 좋다.
사람이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듯이 세상사가 모순 투성이고 아이러니컬이고 양면의 칼인 것이 너무도 많다. 생각하기에 마음먹기에 따라서 음지가 양지가 될 수 있고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흑백이 전도되기도 하는.
나이 드니 시인의 마음으로 모든 생명에 유한한 존재감에 감동할 줄 아는 이런 삶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 참 좋다.
악성 곱슬머리@흰머리면 어떠하리. 누구나 나이 듦은 피해 갈 수 없을 테고 나는 다만 남들보다 먼저 부분 노화가 찾아온 것일 뿐이다.
얼굴에 주름이 늘고 머리가 하얘져도 기죽지 않는 기백과 시들지 않는 정신이 있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청춘'이란다는 시어에 마음이 꽂힌다.
나이와는 별개로 인생길에 열정만이 왕도(王道)이다. 가슴속에 아름다움과 희망, 용기, 열망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한 삶은 풍부해지고 풍성해진다. 표상에 흔들리지 말고 본질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