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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Jun 08. 2024

잃어버린 '우리집'을 찾습니다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김정관의 단독주택 인문학' 1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우리는 집에서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이제는 아파트 생활에 적응해 살다 보니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의식하지 못하며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단독주택을 지어 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걸 보면 집다운 집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집을 잃어버렸다'라고 말을 던지면 단말마적인 표현일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향을 잃었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돌아갈 집마저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런데 잃어버린 고향은 어찌할 수 없다 해도 집을 집답게 지어 산다면 잃어버렸던 우리집을 되찾을 수 있다. 

    

왜 새삼스레 집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누구나 집에서 살고 있는데 돌아갈 집이 없다니 웬 생뚱맞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집 없이 사는 사람이 없는데 이런 우문이 있느냐고 하는 사람은 ‘House’와 ‘Home’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며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보통 집이라고 얘기하는 건 식구들의 일상을 담은 'Home'이다.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목적지를 집으로 잡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Home이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에 하는 수없이 들어가는 집이라면 숙소나 다름없는 House가 아닐까 싶다.    


밤 늦은 시간에 불 밝힌 집보다 어둔 집이 더 많은 아파트, 아직 아무도 귀가하지 않아 불 꺼진 집을 '우리집'이라 할 수 있을까? 

 

빌딩 숲에 하늘을 가리고 치솟아 있는 아파트도 Home이 있다. 어스름하게 하늘이 사라질 무렵 창에 불이 켜지는 집은 아마도 불빛만큼 따스한 Home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밤이 이슥한 데도 불빛이 보이지 않은 집은 Home이 아닌 House일 것이다.     


아파트는 사람이 산다지만 밤이 깊은 시간에도 불이 켜지지 않은 집이 많다. 집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집은 Home이고, 어떤 집은 House이다. 아파트에 살아도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창밖을 넘는 집이 있지만 밤늦도록 불이 켜지지 않은 집이 자꾸 느는 건 왜일까?     

  

아파트에 살면서 잃어버린 '손님'    

 

옛날에는 집에 손님이 들지 않으면 가문의 기운이 쇠한 걸로 여겼다. 그래서 집에 오는 손님은 걸인이라 해도 함부로 내치지 않았다. 세도가의 집은 수십 명의 식객이 머물러도 성의를 다해 숙식을 제공하는 걸로 가세를 드러냈다. 손님이 그 집의 기운을 찾아들게 되는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기 전만 해도 외지에 가게 되면 친척이나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객실이 따로 없는 집에서는 손님이 안방을 가장과 함께 썼다. 아이들의 친구가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그 집 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서 온 손님이든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도 우리집에서 한 식구처럼 지내는 게 자연스러웠다.      


해운대 초고층 아파트 풍경, 백 층 가까운 키높이로 해안선을 가로 막아 바다 풍경을 독점하고 있다. 아무리 큰 집에 살아도 아파트에는 손님을 들이지 않는다.


우리 식구만 사는 집은 집안 분위기가 정체되기 마련이며 손님이 드나들어야 생동감이 넘치게 된다. 지금은 자식도 한 집에 같이 살지 않으니 손님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식을 결혼해서 며느리나 사위를 보면 이들보다 한 손님이 없다. 그런데 아파트는 손님이 머무르기가 편치 않아 자식들마저 자주 오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 아파트는 외롭게 살 수밖에 없는 집이다. 사위와 며느리가 기꺼이 올 수 있어야 손주도 자주 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사는 즐거움에 손주와 함께 지내는 일만큼 더한 게 있을까?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잃어버린 손님, 자식마저 불편하다며 잘 오지 않으니 이만큼 안타까운 게 없지 않을까 싶다.  

   

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시 볼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이갑수     


집에 대해 이 글귀만큼 명약관화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바깥에서 지내다가 잠잘 시간이 되니 어쩔 수 없어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볼 일을 마치고 나면 서둘러 돌아가는 곳이 '집'이다. 그래서 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인데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곳이 되고 있다.      


필자가 설계한 단독주택 심한재, 한옥의 사랑채와 안채 개념을 접목해서 채 나눔으로 거실동과 침실동이 나뉘어져 있는 단독주택이다. 며느리와 사위도 기꺼이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집에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게 아파트이다 보니 밖으로 나돌게 된다. 우리나라가 카페 천국이 되어있는 게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도 대학생만 되면 서둘러 집을 탈출하듯 떠나니 부부만 남게 되고, 부부만 살게 되면 각방살이를 하게 되는 집이 아파트이다. 발코니마저 없애 버려 갇힌 듯 살게 되니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다.  아파트에 살아도 마당의 역할을 하는 발코니가 있으면 집에서 있는 일을 만들 수 있으니 집에 생기가 돈다. 


단독주택을 지어 살 수 있다면 설계를 의뢰하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식구들이 집에 있는 좋아하면 Home, 밖으로 나돌고 잠만 자는 집은 House라고 했다. 그런데 건축사는 ‘어떤 집-House’에만 관심을 가질 뿐 ‘어떻게 살 수 있는 집-Home’은 오로지 그 집에서 살아야 하는 건축주의 몫이다. 



              

아파트냐 단독주택이냐를 선택해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에 사는 게 얼마나 좋으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생각은 온 가족이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고 싶다고 해도 식구 모두의 동의를 얻어 실행에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파트나 단독주택이나 ‘우리집’이라고 식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이다. 잠을 줄여가며 끼니를 거르며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하나같이 ‘행복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사는 게 안타깝다. 집과 행복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길래 집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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