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둔 교수의 노후를 위한 전원주택 설계 기록
집일까?
언제부터였을까? 정해진 박스 틀 속에 차곡차곡 우리의 삶을 구겨 넣는데 익숙해져 온 것이. 유행 따라 차를 바꾸듯 일 년을 살기도 하고, 십 년도 채우지 못하고 이 아파트 저 아파트를 옮겨 사는데 익숙해져 버린 우리네 삶의 방식. 우리 집, 우리 동네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무슨 무슨 아파트 몇 동 몇 호가 우리네 주거가 되어 버렸다.
집이냐?
아파트는 걷어버리면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텐트처럼 짐만 들어내면 아무런 미련 없이 옮겨갈 수 있다. 내 아이가 자라온 기억도, 이웃과 나눈 정도 옷에 묻은 먼지 털어내듯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일까? 아무 미련 없이 주소 바꾸고 어디든 갈 수 있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도시인의 내면은 외로운 기억 밖에 없다.
집이다.
나를 담고 식구들과 함께 살아갈 행복한 삶을 담아 내가 나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집이다. 담기만 하면 그만인 일회용 용기가 아니라 맛을 제대로 내줄 수 있는 그릇 같은 집이다. 된장국은 뚝배기에, 차는 다기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나의 삶도 그렇게 올바르게 담고 싶은 그런 집이 집이다.
정년을 몇 해 남기지 않은 때에 돌아가 살 수 있는 집을 준비하시는 모교의 공대학장을 지내셨던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평소 교수님과 파트너로 일을 함께 하며 신뢰를 쌓고 있던 친구에게 건축사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하셨다. 교수님은 친구에게 '자네처럼 믿을 수 있는 건축사'라는 전제를 하셨는데 친구는 주저 없이 나를 천거한 것이다.
그동안 작업했던 단독주택 중에 완공된 집과 실현되지 못했던 설계 자료를 교수님께 보여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자료를 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하시더니 쾌히 의뢰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완공된 집 중에 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셨다. 마침 대지와 멀지 않은 곳에 준공한 지 3년쯤 되었고 당호를 ‘양화당養和堂’으로 지었던 집이 있어 위치를 가르쳐 드렸다.
현장을 처음 방문했던 날, 교수님은 양화당을 다녀오셨다고 하시며 내가 설계자로 정한 게 안심이 된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그 집도 마음에 들지만 양화당에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집 자랑을 하는지 사는 이가 그렇게 좋아한다면 틀림없다고 생각하셨단다. 건축사만큼 건축주가 마음에 들어 하는 집이라면 좋은 설계를 기대해도 될 것이라며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후한 점수를 주신다.
대지가 있는 기장군은 부산시의 자치구에서 구가 아닌 유일한 군으로서 아직 도시화가 덜 이루어진 전원도시이다. 대지는 산속에 들어앉은 동네에서도 길이 끝나는 곳에 숨어 있었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의 오솔길을 한참 돌아 언덕을 오르니 집터가 보였다. 산에 둘러싸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에서도 숲 밖에 보이지 않는 안락한 터였다.
아무리 타는 듯이 더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용소천 상류가 대지 앞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길은 그 내를 다리로 이어 텃밭을 낀 대지에서 끝이 났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은 암벽으로 배후를 친 산을 뒤로하고, 개천이 흐르는 남서향으로 열려있는 쪽을 제외하고는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집터라고 보기보다 작은 절이 들어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교수님은 대지에 있는 오래된 집으로 벌써 거처를 옮겨 텃밭에 채소를 가꾸며 이곳에서 지내고 계셨다. 앞산에서 땄다며 산딸기 주스를 내어 주셨다.
교수님은 평생을 학자로, 토목전문가로, 교육행정가로, 행정자문역으로 열심히 살아오신 분이다. 곧 정년이 되는데 앞으로는 흙과 가까이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하셨다. 평생 연구한 결과도 정리하고 찾아오는 후학에게는 가르침과 함께 쉴 수 있는 공간도 나누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가족은 산으로 들어와 사는 건 바라지 않으니 거의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큰 집은 아니라도 교수님의 현재의 모습이 집으로 표현되었으면 한다는 화두를 주신다. 혼자 살지만 누가 오더라도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집이길 바란다고 하신다. 외관은 크지 않은 집이지만 당당한 품격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혼자 살아야 하므로 찾아오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아 묵어갈 수도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크지 않은 집이지만 집주인의 격이 드러날 수 있는 외관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은 교수로 살아온 삶이 집으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으시다는 걸 느꼈다. 은퇴한 이후에 평범한 노인으로 지내는 동료 교수님들의 모습으로 보면 회한이 느껴진다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내비치셨다.
사람이 집을 짓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사람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나 같은 집으로 설계해 주시게'라는 교수님의 당부가 화두처럼 다가왔다. 사람은 늙어가지만 집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교수님을 닮은 집으로 영생을 누릴 수도 있겠다.
경주 양동마을은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첫 단독주택을 설계하면서 영감을 얻게 된 곳이다. 양동마을은 약 520년 전 형성되었다 하는데 지금도 월성손씨 40여 가구,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양 씨족이 세거 하면서 경쟁하듯 집을 지었지만 마을의 대표적인 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은 가풍이 다르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다.
'나 같은 집'이라는 교수님이 주신 설계 지침은 마치 화두를 받은 것과 같았다. 교수님은 어떤 분이며 건축주를 닮도록 설계하려면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2004년도에 작업했던 설계 기록을 고쳐 써 올리는 글
설계 상담 : 도반건축사사무소 (T 051-626-6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