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관 Sep 16. 2024

며느리가 다녀가야 손주를 안아볼 텐데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단독주택 인문학 8

아파트는 기성품 집이다. 그러니 아파트는 집이라 해도 어차피 골라서 구입했으니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불만을 모르고 그냥 살고 있다고 해도 아파트가 우리 식구의 삶을 얼마나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는지 생각은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가족들과 살아가는 삶의 가치가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우리 식구들만을 위한 우리집’을 지어서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려고 해도 어떻게 지어야 우리 식구의 삶에 딱 맞는 맞춤집이 될 수 있는지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떤 집이라는 모양새’는 전문가가 해결해 주겠지만 ‘어떻게 살 집이냐는 쓰임새‘는 건축주가 답을 내야 하므로 조목조목 잘 따져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살고 싶다는 ’우리집‘의 얼개를 잘 짜서 건축사에게 전달해야만 우리 식구들의 삶을 온전하게 담야 낼 맞춤집으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상님들이 살았던 한옥의 설계자는 건축주

         

옛집인 한옥의 설계자는 집을 짓는 대목이 아니라 집주인이었다. 집주인이 집을 어떻게 쓸 것인가 구상이 끝나면 대목은 그 구상에 맞추어 한옥의 조영 법식에 의해 지어내었다. 한옥은 외관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건 집을 짓는 재료와 조영 법식에 따라지었기 때문이다. 쓰임새만 주어지면 모양새는 이미 빈틈없이 지을 수 있었던 게 한옥이었다.   

   

건축주가 의도하는 가풍家風, 대지의 여건이 다르므로 한옥은 집마다 의도가 분명하게 지어졌다. 소프트웨어는 다르므로 집마다 다른 공간 구성이 되고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소재는 어느 집 할 것 없이 나무와 흙이었다. 그래서 건축주가 소프트웨어를 풀어내면 하드웨어는 집 짓는 전문가인 대목이 능수능란하게 백년가가 아니라 천년가로 지어냈다. 그래서 한옥을 지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건 집주인이 결정하는 그 집만의 '쓰임새'였다.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집주인 신중돈은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라 종택인데도 간솟하게 지었다

         

단독주택 설계를 의뢰받으면 우선 건축주에게 ‘이 집을 지어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물어본다. 그렇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답이 별로 없으니 집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모양새이기 때문일 것이다. 쓰임새야말로 집을 짓는 이유인데 이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드무니 안타깝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 우리 식구들만의 우리집‘이라는 생각을 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단독주택을 지어 살려고 하는 분명한 이유는 ‘전문가의 어떤 모양새로 지어내느냐?’가 아니라 ‘우리 식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쓰임새로 지어야 할까?’에 있다. 집집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집을 지어서 살고 싶은 이유’를 필자의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해 보려고 한다. 지금부터 ‘모양새’는 뒤로 돌려두고 ‘쓰임새’를 한번 따져보자.    


아파트에 살다 보면 생기는 일 - 아이들의 독립  

    

누가 뭐라고 해도 아파트는 부부의 집이다. 아파트가 아무리 기성품이라 해도 아이들까지 배려된 가족 모두의 ‘우리집’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아무리 큰 면적의 세대 평면이라 해도 부부 위주의 얼개에다 아이들 방을 덧붙인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파트를 자신이 포함된 ‘우리집’이라 받아들이지 못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집이 있는 지역 대학인데도 학교 근처 원룸을 구해 독립하려고 한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까지 스스로 해야 하는 수고를 무릅쓰고 집을 나가 살려고 하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처지에서 아파트는 ‘우리집’이 아니라 부모의 집이어서 생활하기가 불편하다는 것일 테다.      


우리나라에서 이만한 아파트가 얼마나 있을까? 암만 그렇다고 해도 부부만 사는 집이다.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편히 쓸 수 있는 공간은 세 평 남짓의 방 하나일 뿐이다. 대학에 들어가면 아이들의 생활은 고등학생 때와 다른 일상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의 작은방 하나를 쓰는 더부살이처럼 사는데서 독립하고 싶을 것이다. 결국 아파트는 부부 이외의 식구를 수용하는데도 한계가 있는 집이라는데 이견을 가질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가 '식구 모두의 집'이기보다 ‘부부의 집’이라고 걸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집’이라고 하면 아이들까지 함께 만족하는 집이어야 한다. 만약에 늦은 나이라도 단독주택을 지어서 산다면 부모를 떠나 사는 자식들도 오고 싶어 하는 집으로 지어야 마땅할 것이다.    


단독주택을 지어 살면서 바라는 일 - 며느리와 함께 오는 손주     

     

언젠가부터 우리가 사는 집에는 손님이 들지 않는다. 요즘은 남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건 고사하고 방문하기도 어려운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타 지역을 가게 되면 하룻밤 정도는 의례히 친척이나 지인의 집에서 묵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 자식 사이에도 왕래하려면 사전에 알려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파트에 살기 전에는 우리네 집은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했었다. 조선시대에는 식구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와는 별도로 사랑채를 두어 연중무휴로 손님을 맞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의 손님은 안방을 비워서 잠자리로 내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집에 손님이 들지 않으면 가운이 다한 걸로 여겼으니 어찌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있었겠는가?     


필자 설계 단독주택 심한재, 주인 영역과 손님 영역이 층으로 나누어지고, 거실채는 독립되어 며느리도 편히 지낼 수 있다

그런데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손님을 융숭하게 모셨던 우리의 미풍 양식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심지어 아파트는 며느리와 사위도, 부모도 하룻밤 같이 지내기도 쉽지 않다. 그런 세태는 손주마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나오게 하니 이를 어찌 우스개로 넘길 수 있을까?     

     

아파트에서는 그렇다고 해도 단독주택은 사위 며느리가 편히 묵어갈 수 있는 집으로 짓자. 아파트에서 사위 며느리가 묵어가기 어렵다 보니 손주와 가까워질 틈이 없다 보니 조손 관계祖孫關係마저 서먹하게 되고 만다. 삼대三代가 떨어져 살게 되면서 가장 큰 손님은 자식인데 그마저 시간을 자주 가지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단독주택을 짓는다면 가족을 넘어 식구로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는 집이 되어야할 것이다,   



            

‘우리집’이라고 짓는 단독주택은 손주와 지내기 위해서라도 손님이 찾아와 불편하지 않은 집이 되어야 한다. 사위와 며느리가 편안하게 묵어갈 수 있는 집이라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집’이니 자식들이 제 집처럼 자주 와서 편안하게 묵어갈 수 있어야 손주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는 우리 식구가 된다. 아파트와 다른 단독주택의 쓰임새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을까?     


자식 없이 사는 게 요즘 부부들의 세태이다. 가족은 부부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을 것 같다. 조부모와 함께 손주가 자주 시간을 함께 하는 집이라야 온전한 가족이 이루어진다. 사람이 집을 짓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사람의 삶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원천은 삼대로 이루어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