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흔이 다 된 지인과 점심을 먹었는데 자식에 대해 푸념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네 가족의 현실이 심각한 정도를 넘어 위기에 봉착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분은 슬하에 삼남일녀를 두었는데 다 출가를 시켰는데 아직 손주를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 앉아있던 분은 한술 더 뜨는 말로 마흔이 지난 딸 둘이 다 비혼주의라고 한다.
이 두 분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위로하는 말로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들의 결혼과 손주를 포기하고 있다는 분이 적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노총각, 노처녀라는 말이 아직 사전에 남아 있지만 머지않아 사어死語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결혼 여부를 묻는 게 큰 실례가 된 세상에 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브런치스토리 페르세우스 작가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겠다고 결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결혼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로 이보다 더 명약관화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미래의 가정을 꿈꿀 수 있을까? 또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가지려는 마음을 낸다는 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한 개인이 가지는 사정이라면 국가가 염려할 사항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나라님이 나선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지 미지수이다. 그런데다 개인적인 행복과 관련시켜 결혼이나 출산을 결정한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아이를 가진 부부,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표정은 어떨까? 아이의 양육을 고진감래로 받아들이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지 않을까? 사진-픽사베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알 수 있는 지표는 자살률이다. 부끄럽게도 자살률에서는 부동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으니 더 다른 말이 필요할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지옥과 다름없다는 것일까? 세계 10위 경제 대국, 선진국 등 우리나라를 세계 으뜸이라고 하며 내세우는 국가 브랜드 순위와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반대로 가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라가 선진국이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 물론 국가의 경쟁력은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국가경쟁력을 높이느라 국민의 행복을 돌보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는 그 어떤 정책보다 우선해서 자살률을 낮추고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어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대목이 있다. 행복은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얻어지며 반대로 가정생활에 소홀하면 불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가족 중심의 일상생활과 개인적인 일로 바쁜 삶은 그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일인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30%를 넘어서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행복지수의 상관관계로 볼 수 있겠다. 아이들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부모에게서 독립해 사는 게 대부분이며 그 시기에 맞춰 부부가 각방을 쓰고 있는 집이 적지 않다. 이런 세태도 가정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아이들이 우리집이라며 다니러 왔지만 제 방이 부모의 방으로 되어버린 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가족을 표현하는 이 그래픽을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쓸 데가 없어져 버렸다. 형제자매가 서넛이었던 50대 이상은 이 이미지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데...출처-픽사베이
가족과 함께 하는 가정의 일상을 더 소중히 여기는 집이라야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반대로 개인의 삶에 비중을 두고 살아간다면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가족을 배려하고 내 삶을 희생하면서 가정을 소중하게 여겨야 나의 행복도 보장될 수 있다.
가정이 지켜지는지 여부는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저녁까지 밥을 함께 먹는 게 어려우면 아침밥은 꼭 함께 먹어야 한다. 세끼 중에 한 번도 함께 먹지 않는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함께 먹으면 배만 부른 게 아니라 마음까지 채워진다. 집에서 먹었던 엄마의 밥은 평생의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남는데 자고 갈 방마저 없어진 아이들에게 집과 행복은 어떤 상관관계로 남아 있을까?
아파트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행복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한다. 대도시뿐 아니라 시골의 면 단위에도 새로 짓는 집은 다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어디에 있어도 문이 닫혀 있는 집이다. 현관문만 닫혀 있는 게 아니라 방문도 닫고 사는 집이 아파트이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사람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아파트라는 집은 문을 닫고 사니 이웃과도 그렇지만 가족들끼리도 관계가 닫히기 쉽다. 아파트에 살면서 현관문을 열어두고 사는 집을 본 적이 있는가? 단독주택에 살았던 시절에는 현관문은 잠자는 시간이라야 닫았고 우리 한옥에는 현관문 자체가 없었다.
필자 설계 단독주택 지산심한 3D 모댈링-부부만 사는 집이지만 다락에 손님방을 두어 손주가 오면 편히 묵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며느리와 사위가 편히 다녀갈 수 있다.
아파트는 안방 위주로 설계된 집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중학생만 되어도 방이 좁아서 잠자는 시간에만 쓸 수 있게 된다. 대학생이 되면 집을 나가서 살아야 할 이유가 아파트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데 불편한 집이기 때문이다. 부부만 남아 사는 집은 아이들이 떠나서 남아도는 방으로 각자 편하게 사는 게 좋다며 헤어져 살게 된다.
이미 국민집이 되어 버린 아파트를 탓하며 행복 운운하는 개 무슨 소용인가 싶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우리 식구를 위한 쓰임새로 우리집만의 분위기로 쓸 수 있으면 식구들과의 삶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부부가 각방을 쓰더라도 작은방을 하나씩 쓰고 안방은 함께 쓸 수 있는 서재나 손님방으로 쓰는 건 어떨까? 거실을 서재 분위기로 만든다면 부부나 가족들의 다양한 일상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집'으로 부동산 가치를 따져 집을 마련하고 집값이 오르면 옮겨 사는 게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재산 증식은 더 낫게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집에 어떤 행복이 깃들 수 있을까?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으로 집을 구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에 아파트를 구한다면 밤이 되면 창에 불이 많이 켜지는 동네라면 길택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을 지어 살고 싶다면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 집은 우리집이니 우리 식구들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집에서 일상을 함께 지낼 식구는 물론이고 다니러 오는 가족이나 손님까지 편안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하겠다. 행복은 오직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의 일상에서만 얻을 수 있기에 우리 식구들의 보금자리로 단독주택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