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단독주택 인문학' 10
지금은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도 드라마에서는 서민들이 동네를 이루어 사는 장면이 자주 나오고 있으니 너무 비현실적이다. 단독주택에서 산다는 건 대도시권에서는 어림없는 일이고 중소도시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근래에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서 단독주택에 살고 싶은 꿈을 현실로 이루는 분들이 많아지는 것 같기는 하다. 단독주택에서 사는 꿈을 현실로 이루는 걸 가로막는 높은 벽은 땅값인데 그나마 대지 자체도 찾는 게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식구들만의 행복한 삶을 담을 수 있는 집은 단독주택이라야 한다는 걸 알아챈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나 보다 싶다. 단독주택은 아파트와 달리 마당을 돌보는 일부터 보통 힘든 게 아니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행복은 오로지 우리집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바람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불굴의 의지로 단독주택을 지어내고야 만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이다. 이 말은 공동으로 관리하는 주택이라고 봐도 되겠다. 실제로 집의 내부만 개인 영역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전 세대의 공동 구역이다. 따라서 순수한 우리 가족만의 생활권은 집 안에 한정된다. 집집마다 꼭 같은 평면을 가진 아파트에서 우리 가족만의 일상을 담는 우리집으로 사는 게 쉽지 않다.
아파트는 우리 가족만의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는 아예 담기지 않은 집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 우리집인데도 ‘우리’라는 소속감이 잘 생기지 않는다. 사람이 집을 짓고 나중에는 그 집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간다고 했는데 아파트는 우리 가족의 바람직한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지 않다. 아파트를 설계하면서 '이 집에 살면 행복해진다'는 주문(呪文)이라도 외어주었으면 좋으련만.
현관문은 늘 잠겨 있으니 방문을 허락받지 않으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요즘은 시어머니도 며느리의 허락이 없으면 아들집인데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출입이 자유로운 식구들 마저도 집에 들어오는 걸 꺼리니 이 무슨 조화일까 싶다. 아파트는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내쫓는 것일까?
시부모가 며느리 집에 잘 가지 않지만 아내의 허락을 받지 못한 아들도 부모님을 자주 찾지 않는다. 며느리와 아들은 자주 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손주를 언제 보았는지 모르고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애달프다. 그런데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아파트에 살다 보니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만 이 시대의 슬픈 가족 풍속도이다. 아파트는 시가市價로 따지는 '어떤 집'일뿐 우리 식구들의 행복과 관련된 '이렇게 살 집'이 되기 어렵다.
제주도에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그분이 집터로 마련한 곳은 이효리가 사는 동네라서 인기 절정이었던 애월이었다. 설계를 시작하면서 현장을 방문해 보니 땅을 쪼개서 파는 주택단지였다. 택지를 조성해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도로를 따라 집터가 줄지어서 만들어진 정나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건축주는 우리 부부만 조용하게 여생을 보낼 집이니 크게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단층으로 짓고 방은 안방 하나에 서재만 있으면 된다며 모눈종이에 그린 평면도를 보여주었다. 도로밖에 없는 택지에 작은 집 한 채만 있으면 그분은 아내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내가 던진 한마디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던 자신이 살 집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육지에서 자식들이 찾아오면 잘 방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제주도에 많은 펜션을 언급했다. 부모를 찾아왔든지, 제주 여행을 왔든지 오는 그날은 부모님을 찾아뵐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부모가 사든, 자식이 사든 함께 먹고는 그들이 잡은 숙소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서 시간을 더 보낼 수도 있겠지만.
2박 3일이든 일박이일이든 자식들의 여행 일정이 끝나는 날에 다시 부모를 찾아와서 인사를 드리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분은 아마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전화로 인사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대답을 듣고는 내가 던진 한 마디는 “그러면 손주는 언제 안아보고 조손지간의 정은 어떻게 쌓을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나의 말에 건축주의 표정이 바뀌는 걸 엿볼 수 있었다.
단독주택을 지을 생각에 ‘어떤 집을 지을까?’하고 핀트레스트를 먼저 뒤지면 곤란하다. 식구 중에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이 집이라며 화면을 지목하면 우리집은 그렇게 지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집은 식구들 모두가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우리집’이 아니지 않은가? 눈으로 봐서 보기 좋은 집과 우리 식구들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보금자리와는 방향이 다르다.
단독주택은 우리 식구들이 행복한 삶을 담을 프로그램이 들어가야 아파트와 다르게 살 수 있는 집이 된다. 단독주택을 짓는 시기는 아이들이 어릴수록 좋지만 노후에 살 집이라고 해도 손주들과 함께 지내는 일상을 담아야 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우리집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게 단독주택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떤 연령대로 지내더라도 우리집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야 한다. 자식들이 성장해서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되더라도 늘 다시 돌아가고 싶어야 이상적인 집의 얼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를 보게 되면 어른과 같이 지내도 편안할 수 있는 집이라야 한다. 그래야만 부모가 사는 집이 편안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찾게 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가 함께 하는 삼대가 어우러진 집이 되어야 온전한 가족이 구성된다. 부부와 아이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이대의 가족은 불안정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서 부모 곁을 떠나게 되면서 가족의 해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짝을 얻어 그들의 가족을 이루고 나서 부모를 자주 찾아와야 삼대가 어우러지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이 어우러져 지낼 수 있는 '이렇게 살 집'이라는 단독주택 설계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 집 짓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
집이 사람의 삶을 만들어간다고 하는데 어떤 일상이 담기는 집으로 짓고 싶은가? 우리 식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우리집만의 일상을 담은 스토리텔링은 건축사가 써낼 수 없다. 가정을 이룬 자식이 부모가 사는 집을 자주 찾아와서 지낼 수 있는 단독주택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집이야 말로 손주가 찾아오고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게 될 것이다.
‘어떤 집’과 ‘어떻게 살 집’은 엄연하게 다른 집이다. 한식을 접시에 담아 먹을 수 없고, 양식을 밥그릇과 국사발에 담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 식구의 삶을 온전하게 담을 수 있는 집은 먼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살면 그만이라는 한 사람의 고집이 아니라 식구들이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녹아든 설계로 지어진 집에서만 행복이 보장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