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차를 마시러 왔다고 한다. 내가 누구라고 차 한 잔 하러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왔다는것일까? 내 글을 읽고 평소에 가진 보이차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려고 찾아오는 분들이 가끔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 분은 그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통성명을 하고 나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차를 같이 마시려고 찾아왔다고 했다. 먼저 내가 가장 즐겨 마시는 차를 마셔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멀리서 오신 분이니 아껴 마시는 차를 우려 드렸는데 그분은 고개를 저었다. 이 분이 나를 찾아온 목적이 혹시 차투茶鬪, 시쳇말로 도장 깨기를 하려고 온 것일까?
이른 봄에 만드는 첫물차, 명전차와 우전차
찻잎을 따는 시기는 절기로 봐서 중국은 청명, 우리나라는 곡우 전에 시작된다. 찻잎을 청명 전에 따서 만들면 명전차明前茶, 곡우전이면 우전차雨前茶라고 한다. 이른 봄 처음 따는 찻잎이라서 첫물차라고 하며 최상품으로 친다. 보통 순 하나와 잎 두 개가 되면 찻잎을 따는데 일아이엽一芽二葉, 일창이기一槍二旗라고 부른다.
이른 봄 처음 따는 찻잎으로 만드는 첫물차는 그 이후에 만드는 차에 비해 향과 맛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겨우내 축적된 성분이 담겨 나오는 첫물 찻잎에는 아미노산이 많고 상대적으로 폴리페놀은 적다. 아미노산은 감칠맛이 많고 폴리페놀은 쓰고 떫은맛이니 첫물차를 제일로 치는 이유가 된다. 첫물차는 찻잎을 따는 기간이 짧아서 만들 수 있는 차가 한정되므로 찻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첫물차로 만든 고수차, 중국 수요에 맞추기도 어려워서 우리나라에 공급하는 게 쉽지 않다. 수령 1백 년 이상인 유명 산지 고수차로 만들어진 첫물차는 가격이 높아서 수요가 많지 않다
첫물차는 차 싹 하나에 이파리 두 개라서 잎을 따는 인건비도 원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첫물차를 만드는 절기가 지나면 찻잎은 쑥쑥 자라난다. 두물차나 세물차는 첫물차에 비해 큰 잎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같은 인건비로 따는 찻잎의 중량이 늘게 된다. 그 해에 만들 수 있는 첫물차의 양은 한정되는데 수요에 따라 찻값이 달라진다.
겨우내 축적된 양분이 가득한 첫물차와 봄비를 맞아 쑥쑥 자라난 잎은 향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엽종 찻잎으로 만들어지는 보이차는 일아이엽과 일아삼엽은 중량에서 배 이상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니 차농들은 첫물차라도 일아이엽으로는 모차를 잘 만들지 않는다. 지유地乳라고도 부르는 보이차의 별칭은 첫물차가 가져야 할 텐데 시장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늦은 봄차로 곡우차와 입하차, 그리고 가을차는 곡화차
흔히 생차로 만나는 봄차는 첫물차 이후에 만드는 곡우차와 입하차이다. 이때 만들어지는 차는 봄차라고 해도 찻잎은 상당히 자란 상태가 된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햇볕을 많이 받은 찻잎은 폴리페놀 성분이 늘게 된다. 따라서 쓰고 떫은맛이 첫물차에 비해서는 많아지지만 대부분의 봄차는 어린잎과 자란 잎을 섞어서 만든다.
여름차는 잘 만들지 않는데 너무 빨리 자라는 잎은 싱거운 맛을 내기 때문이다. 여름은 기온이 높아지고 비를 맞아 생장이 빨라지므로 토양 성분 함량이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혹 유명 산지 차는 여름 찻잎을 섞는다고도 하는데 원가 비중을 줄이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한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듣는 저렴한 차가 바로 이런 사정이 숨어 있다.
이른 봄 차나무에는 새싹이 올라온다. 청명 이전에 싹 하나와 잎 두 개를 따서 만드는 첫물차는 진한 향미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곡화차라고 부르는 가을차는 봄차 못지않은 인기가 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찻잎의 생장이 더디어진다. 곡화차는 진한 맛에서는 봄차에 미치지 못하지만 향기는 다채롭게 된다. 늦은 봄차보다 곡화차가 더 좋다고도 하며 이 시기의 차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어느 시기의 찻잎인지 잘 살펴서 차를 구입하는 것도 보이차를 즐기는 요령이라고 본다. 봄차라고 해도 다 자란 잎으로 만든 차는 쓰고 떫은맛이 부담이 된다. 고수차라고 해도 늦은 봄차는 수령이 어린 소수차의 이른 봄차가 더 나은 향미를 가질 수 있다. 내 입에 맞는 차를 선택하는 우선순위는 산지가 될 것이고 그다음은 잎을 따는 시기를 살펴야 할 것이다.
미처 몰랐던 첫물차로 만든 고수차의 향미
나를 찾아왔던 그분은 첫물차로만 고수차를 만들어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우려냈던 차에 고개를 저었던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그는 엽저를 접시에 쏟고는 큰 잎과 어린잎을 구분해서 따로 차를 우려 보라고 했다. 각각 차를 우려 마셔보니 과연 큰 잎과 어린잎은 향미가 많이 달랐다.
어린잎으로 우린 차는 목 넘김이 부드러웠지만 큰 잎은 목구멍에 걸리는 게 마시기가 불편했다. 내가 평소에 즐겨 마시면서도 목 넘김이 다소 불편해도 별 문제를 삼지 않았는데 비교해서 마셔보니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소장한 차는 고수차로 고급 라인에 올라있었지만 결국 첫물차와 그 이후 차가 병배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셈이다.
마른 차를 넉넉하게 넣고 세 탕 정도 우린 뒤에 찻잎을 어린잎과 큰 잎으로 나눈 다음 각각 우려서 음미해 보면 향미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분이 가지고 온 차를 우려서 마셔보았다. 그 차는 2010년에 만든 첫물차로 만든 고수차이다. 적절한 고미에 단맛이 따라오면서 목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느낌이 참 좋았다. 여태껏 마셔왔던 고수차와는 다른 향미를 가진 차였다. 그분을 만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차도 마셔보았는데 역시 첫물차는 특별한 향미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분은 일찍 보이차의 가치를 알게 되어 2007년부터 청명 이전에 차 산지에 가서 첫물차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 무렵에는 모차 가격이 비싸지 않아서 몇 년간 계속 일아이엽으로만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첫물차가 그 이후의 차와 어떻게 다른지 실감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하지만 그분의 차는 외식으로 가끔 마셔야지 다반사로 접할 차가 될 수 없으니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숙차는 누구나 부담 없이 함께 마실 수 있는 차이다.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대엽종 찻잎의 거친 성질을 가라앉히게 된다. 그래서 숙차는 모차의 등급보다 발효 기술이 더 중요한 차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생차는 찻잎의 본성을 잘 살려서 만들지 않으면 좋은 차가 되기 어려우니 어떤 조건을 가진 찻잎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내 취향에 맞는 생차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차 산지인데 차 가격이 결정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다음이 찻잎을 따는 시기인데 차 산지는 많아도 첫물차로 만든 차는 드물다. 또 중요한 요인이 수령이지만 소비자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차 산지는 노반장이나 빙도노채이면서 첫물차로 만들어진 수령樹齡 백 년 이상 차나무 잎인 고수차는 누가 마시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