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무설자의 보이차 이야기' 에필로그
차에 대한 탐심, 혹은 욕심은 법정 스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그런 말씀은 단순히 더 좋은 차에 대한 탐심은 아닐 것이다. 매일 너댓 차례 차를 우려 마시는 내 처지에서 보면 차 한 잔의 의미가 어떠한지 수긍이 간다. 차를 마시며 달다 하지만 설탕 같은 단맛은 아니고 쓰고 떫은맛이 기본인지라 감탄할 만한 향미를 가진 차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매일 3리터 이상 스무 해 가량 차를 마셨으나 제대로 향미를 받아들인 지는 서너 해 정도 되었을까 싶다. 타고난 미각이 둔감해서 차맛을 음미하며 마셨다고 할 수 없고 물 마시듯 맛도 모르고 마셔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술을 즐기지 않으니 차가 입에 맞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차가 어떠해서 좋은지도 몰라서 스스로 선택해서 구입했던 차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해도 되지 싶다.
보이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구매 욕구를 억제하느라 애를 먹는다. 보이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알면 알수록 눈에 들어오는 차의 향미가 궁금해진다. 차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차 소개 글을 읽노라면 그 차들이 내가 찾는 향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된다. 보이차는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으니 가진 차가 아무리 많아도 수장 욕구를 채울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열 편이 백 편이 되고 백 편인가 싶으면 어느새 백 편이 더 느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더구나 보이차는 저렴하게 나오는 차가 많아서 용돈으로 구입할 만하니 지름신이 내리기에 딱 좋다. 게다가 지금 저렴하게 구매해 두면 십 년 정도면 몇 배의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 서슴없이 용돈 투자를 하게 된다. 일곱 편 들이 한 통에 20만 원, 30만 원 정도 쓰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게 보이차이다.
그렇게 사고 또 사게 되면서 도대체 얼마나 구입하면 지름신이 나를 떠날까 두려워기도 할지 모른다. 귀가 얇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차를 둘 자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멈추게 될 수도 있고, 환금성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정보를 알아차렸을 때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후발효차인 보이차는 유통기한이 없고 오래 두면 더 좋은 맛으로 가치가 올라가는 건 틀림없으니 모아둔 보이차를 바라보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으로도 후회할 일은 아닐지 모르겠다.
보이차를 마시면서 틈틈이 공부를 한 덕에 두 편이나 세 편 정도씩 소량 다품종으로 구입했다면 다행이겠다. 그렇지 않고 돈이 된다는 믿음으로 품목 몇 종류를 대량 구입한 경우는 투자 대비 수익이 생겨야 하는데 그 확신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이차가 마시는 차일뿐 투자 대상으로 삼는 건 무모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보이차 관련 카페에 차를 정리한다며 내놓은 걸 보면서 차 구입의 원칙을 '내가 마실 차'로 삼아야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보이차 생활이 스무 해가 되어 가다 보니 내가 수장하고 있는 양도 적지 않다. 보이차를 시작하면서 거의 숙차 위주로 마셨기 때문에 차를 수장하는데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종류로 헤아려보면 300 종은 족히 넘는 것 같다. 통으로 가지고 있는 차만 해도 오십여 통은 되지 않을까 싶다. 생차와 숙차를 나누어보면 아마도 반반은 되지만 한 종류로 두 통 이상인 차는 숙차뿐이다.
십여 년 전부터 생차를 마시게 되면서 모아둔 차를 보니 대부분 고수차이다. 이 차들은 2008년부터 운남에서 고수차를 만드는 한국 분들에게 구입했었다. 2010년도 이전에는 고수차라고 해도 찻값이 대지병배차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고수차에 대해 일찍 눈을 뜬 그분들은 중국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시기에 자동차도 들어가지 않았던 오지 차산을 찾아 고차수 첫물차로 차를 만들었다.
빙도노채 첫물차가 지금은 한 편에 백만 원 이상 호가하지만 그 당시는 불과 십만 원도 하지 않았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빙도노채를 겨우 한 통을 구입해서 몇 편은 나누어주고 지금은 한 편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한 편을 헐어서 마시려니 손이 떨려 때를 기다리고 있다. 차맛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 두 편을 마셨는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처럼 아까운 차를 소진하고 만 셈이다.
보이차를 마시며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라고 하면 마셔지지 않을 차를 구입하게 되는 일이다. 숙차는 누가 마셔도 되기 때문에 잘못 구입했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생차는 ‘싸고 좋은 차’로 알고 몇 통씩 구입해서 훗날 마셔지지 않아 쌓이게 된다. 내가 마실 차만 구입해야 하는데 덫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행착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십 년을 숙차 위주로 차 생활을 하다가 생차로 접어든 지 다시 십여 년이 되었다. 숙차는 아침에 식전 차로 마시고 나면 그 이후로는 하루 내내 생차를 마시고 있다. 확실히 생차 위주로 보이차를 마시니 뚜렷하게 차마다 다른 향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왜 노반장이나 포랑산 등 맹해 차구의 차를 좋아하는지, 빙도노채와 석귀 등 임창 차구의 차가 어떤 향미인지 느끼는 차 생활을 하고 있다.
3년 전 어느 날, 서울에서 차를 마시려고 찾아온 분이 있었다. 이 분은 2008년부터 청명 전에 운남에 가서 고수 첫물차로 수년 간 보이차를 만들어서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 이후 몇 차례나 그분은 부산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함께 차를 마셨는데 첫물 고수차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되었다. 그분이 넉넉하게 나누어주신 2009년 산 첫물 고수차와 야생차를 2년 가까이 마셨다.
그분이 만들어서 소장하고 있는 첫물 고수차는 보이차를 대하는 내 모습을 비추어주는 마술 거울이었다. 두 해에 걸쳐 마셨던 그 차들이 내 몸에 스며들었는지 다른 차를 마시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그 반응이란 내가 마실 수 있는 차와 그렇지 못할 차가 구분이 된다는 것이었다. 첫물 고수차만 계속 마시다 보니 내 몸은 다른 차를 거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다른 차에 대한 탐심이 사라지면서 차 구입은 아예 관심 밖이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차를 마실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나의 차 생활이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잘 마시고 있었던 내가 가진 차들을 어떻게 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마셔야 할 차를 어째야 하나? 한 달 정도 그분이 나누어준 고수 첫물차를 마시지 않고 내가 가진 차 중에 입에 맞는 차를 찾아 마셨다. 그러고 나니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차가 많아지면서 보이차에 대한 탐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생차 위주로 차 생활을 하고 있다면 자신만의 '궁극의 차'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는 차는 없지만 나만의 ‘궁극의 차’는 나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차이다. 나만의 '궁극의 차'는 틀림없이 고수차로 첫물차일 것이며 6개월 이상 그 차만 마시게 되는 차라고 보면 되겠다. 나만의 ‘궁극의 차’가 내 몸에 스며들면 내가 마실 수 있는 차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의 차’로만 차 생활을 할 수는 없는데 그렇게 되면 고립되어 외롭게 차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의 차’는 혼자 마셔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차여서 내가 마실 차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궁극의 차'는 내가 마실 차의 거울이 되고, 잣대가 되어 ‘더 좋은 차’에 대한 탐심을 버리게 한다. 나만의 '궁극의 차'를 찾으니 보이차에 대한 탐심이 끊어졌고 이제는 온전히 차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무설자의 보이차 이야기' 에필로그
원문 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