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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Nov 17. 2021

열두 평짜리 작은 집에서 읽어낸 행복 이야기

경주 어느 골짝에 초가와 너와집을 짓고 사는 분께 하룻밤 신세 진 얘기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아파트에서 벗어나서 전원에서 살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이 많다. 닭장이라는 표현을 하면서도 벗어날 대안이 없어 아파트에 살 수밖에 없는 게 이 시대 사람들의 현실이다. 전원생활을 그리워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이미 익숙해진 삶에 순종하고 만다.

 

그렇지만 용기 있는 젊은이들은 귀농을 감행하고 직장 생활을 끝낸 중년들은 귀촌을 결심해서 단독주택을 짓고 있다. 도시에서 시골로 삶터를 옮겨 살아보면 땅을 밟고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바쁘게 살아온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느리게 살아야 하는 시골 사람으로 변한다는 게 애당초 가당치 않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시골에서 생업을 가지고 살면 귀농이고 집만 지어서 도시에서 옮겨 살기만 하면 귀촌이라고 한다. 시골 생활에 정착하기 위해 농사일을 배우는 등 생업을 가지기 위한 준비를 오래 한 '귀농'은 성공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 같은 전원생활을 동경해서 시골에 집만 지어서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귀촌자들은 도시로 다시 돌아오는 분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전원주택을 짓고 살려면 '어떤 집'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되어야 한다


'어떤 집에서 사느냐'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누리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버텨내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 중에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너무 단순한 생활이 주는 무료함을 이기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에서 살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명제에 대한 확신을 가자고 나서 생활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 그 답을 찾아야만 '어떤 집'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으며 준비된 삶의 방식으로 옮긴 터전에서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어떻게 사느냐의 일차적인 조건은 아파트에 살면서 누린 편한 생활 습관에서 벗어나야만 자연과 하나 되는 시골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떻게'라는 명제의 답을 찾아 이렇게 살겠다는 삶의 방향을 설정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어떤'집을 소개해 본다.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편안한 산의 능선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경주 시내에서 한참 들어가는 산골이다. 산에서 보내는 시간은 천천히 흘러 계절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풍경으로 세월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늘의 조화가 주는 맑고 흐리고 비 오는 그날의 날씨는 매일 맞이하는 일상에 리듬을 주게 된다. 


여기서 가지게 되는 느린 삶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도시의 삶에 비해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내면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찾아오는 이가 반가운 이 집에서는 그 누구라도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지 않겠는가? 도반으로 지내는 두 사람이 이웃해서 사는데 그 인연을 다지는 매개체는 차라고 한다. 차 한 잔의 자리에는 늘 다정한 다담茶談이 따르기 마련이니 향기로운 인연이 이어가게 될 것이다.  

안채는 초가, 바깥채는 너와로 지붕을 얹었다


안채는 초가로 짓고 너와를 이은 바깥채와 욕실과 창고를 밖에 두어 지은 집은 참 소박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초가는 해마다 지붕 이엉 잇기를 새로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소박하지만 깔끔한 집주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바깥채의 너와지붕은 초가처럼 수고를 하지 많아도 되는데 초가가 주는 정서를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안채는 부엌과 방이 하나로 되어 있다


안채를 살펴보자. 안채와 바깥채는 각각 여섯 평 정도인데 여섯 평이라면 삼십 평형대 아파트의 거실과 주방을 합친 면적보다 적다. 오른쪽의 문이 달린 부분은 정지와 다용도 공간이며 왼쪽이 안방이다. 안방은 세 평이 채 못 되는 크기라서 다섯 명이 둘레상을 놓고 밥을 먹으니 딱 맞다. 머리를 숙여야만 안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문을 낮게 만들어 달았을까? 


좌식 생활을 하는 우리 조상들은 방의 천장 높이를 낮게 했다. 천장 높이가 의식이 되는 건 앉아 있을 때보다 누웠을 때이다. 사람의 서 있을 때의 키높이가 아니라 앉거나 누웠을 때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방을 상상해 보면 침대와 의자를 쓰는 아파트의 천장 높이와는 차이가 있어야 하겠다. 


천장 높이가 낮은 방으로 들어갈 때 방문의 높이가 낮으면 허리를 숙이게 됩니다. 천장 높이가 낮은 방으로 머리를 숙여서 들어가면 천장이 낮은 방이 금방 적응이 되지만 서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이제 한옥에서 방문이 낮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깥채는 지붕을 너와를 얹었다


바깥채 여섯 평의 방에 차실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이제 바깥채를 살펴보자. 바깥채의 면적도 여섯 평 정도이며 왼쪽이 네 평 정도인데 객실이며 오른쪽은 두 평 가까이 되며 차실이다. 내가 이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세 명이 누워 편히 잘 수 있었다. 


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집주인의 집이라 차실과 객실이 이 한 채에 들어 있다. 이 산골에 드는 사람이 하룻밤을 묵어가지 않으면 온전히 이 집에 온 객이 아닐 것 같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다담이 차실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차맛이 깊은 것 같다. 



이웃한 집의 정경, 이 집도 초가와 너와집으로 지었는데 아마도 같이 지었지 않나 싶다

이 초가는 이웃해서 서로 등을 기대고 있는 집이다. 두 집이 아마 같은 콘셉트로 도반이 의논해서 지었나 보다. 이 집의 안채에는 들어가 보지 못해 지금도 집 안이 궁금하다...  


객방에 드는 새벽의 여명


우리가 묵었던 바깥채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분위기이다. 이 사진은 동트는 새벽빛이 창호지 문에 비치는 장면이다. 저 문을 열고 맞이하는 아침 풍경은 어떨까?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받은 아침상이다. 누구나 받고 싶은 정겨운 상이 아닌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오는 찌개와 국그릇의 김이 정겨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집의 바깥채 모습이다. 오른쪽 집 박공의 풍판이 집을 더 예스럽게 보이게 한다. 어젯밤에는 오른쪽 집의 차실에서, 아침에는 왼쪽의 차실에서 차를 마셨다. 


두 집은 다우로써 이웃이 되었다고 했다. 두 집을 오가며 차를 마시고 어울려서 살아가는 두 분은 둘도 없는 벗이자 이웃이다. 산골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이 분들이 준비한 집짓기 프로그램이었나 보다. 





두 집 다 벽난로에 불이 피어오르는 두 평 남짓 아담한 차실에서  찻물 따르는 소리와 도란도란 나누는 다담이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비 오는 밤에 마당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달빛 밝은 밤에는 창가로 다가오는 바람소리에 문을 열어 보기도 할 것이다. 불현듯 옆 집에서 차를 마시고 싶어 나섰다가 서로 마주치게 되는 상상도 해보았다.  


멋진 집, 그림같은 집이기보다 이런 집을 짓고 살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할 것이다. 산골 작은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읽어낸 이 집의 표정을 내 나름대로 스케치해 보았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우리 부부의 노후에 살 집에 대한 생각의 매듭 하나를 풀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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