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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 LA May 09. 2024

"수혈 거부하면 수술 캔슬할게요", 어이가 없었다

암투병 일기

수술하기 전날 입원동 휴게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6차 항암이 끝나고 검사했던 MRI, CT, 초음파, 뼈검사 등의 결과가 드디어 나오는 날. 결과에 따라 수술범위와 방법이 결정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왔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어떤가요? 괜찮나요? 암세포가 다 없어졌나요? 아님 아직 남았나요?"

의사 선생님은 다양한 검사 결과지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길게 느껴져 먼저 질문 폭탄을 던져대기 시작했습니다.


"잠깐만, 음... 다른 곳에 전이된 곳은 없는데 MRI에 뭐가 조금 보이기는 하네. 하지만 이건 꼭 암세포라고 할 수가 없어. 결국 열어서 직접 조직 검사를 해보지 않는 이상 확실히 말하기가 그렇지."


"그럼 암세포가 남아 있는지, 완전관해인지 수술을 해봐야 알 수 있다는 건가요?"

"맞아. 림프절에도 원래 전이가 있었고 유방에도 2군데나 암세포가 있어서 내일 수술하면서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내일 수술하나요?"

"그럽시다. 오늘 입원해서 내일 수술하는 걸로 합시다. 부분절제 시도해 보려고 하는데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바뀔 수도 있어요."


결국 기대했던 속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스케줄대로 입원과 수술은 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사의 안내대로 남편과 2인실로 들어가 보니 풍경 좋은 창가 침대는 다른 환자가 있었고 문쪽을 배정받아 짐을 풀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웠습니다. 


그날 저녁, 다음날 수술을 위한 피검사를 했는데 빈혈 수치가 낮다며 간호사가 찾아왔습니다. "빈혈수치가 7.2(헤모글로빈 정상치 11.2~14.8)가 나와 수혈을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항암제 때문에 이미 다양한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는 나는 수혈까지 해야 한다고 하니 불안한 마음도 들고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수혈, 꼭 해야 하나요? 미룰 수 있으면 최대한 미루고 싶어요"

수혈을 거부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수혈 부작용도 있으니 최대한 늦추고 싶은 심정에 담당의사에게 확인을 부탁했습니다.


"그럼 담당의와 마취과 선생님과 의논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라며 간호사는 방을 나갔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까요. 당직 의사 같은 분이 내 방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엄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빈혈 수치가 7.2인데 8 이하면 수술 불가능합니다. 만약 수혈 거부하시면 내일 수술도 캔슬할게요"


순간적으로 너무 기가 막혔습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수술을 캔슬하겠다고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하면서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수혈을 완전히 거부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조금 늦추고 싶은 마음에 꺼낸 이야기가 당직 의사인지 주치의인지의 심경을  건드렸나 봅니다. 이미 짜인 스케줄이 수혈 거부로 꼬이는 게 싫었던 걸까요? 아니면 환자의 무모한 거절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왜 수혈을 하고 싶지 않은지 찬찬히 길게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그 의사의 태도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 것도 있고, 수술 전 이런 일로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짧게 대답했습니다.

"수혈하겠습니다" 


그제야 분이 풀린 얼굴로 내 방을 나가는 의사 뒤로 남편이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내 얼굴색이 좋지 않은 것만 보고도 알아차린 듯 "무슨 일이야?" 하며 묻길래 방금 전 일을 흥분해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중요한 수술날이야. 당신을 위해서 해 준 이야기일 거야. 좋게 생각하고 잊으면 어떨까?"라고 남편은 열받아하는 나를 위로하며 진정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시간이 지난 뒤 떠올랐습니다.

"환자분이 수혈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빈혈 수치를 높여야 수술을 잘 받을 수 있고 수혈을 통해 안전하게 수술도 받고 건강도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따뜻한 설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수혈을 한 후에도 빈혈 수치는 8에 미치지 못해, 2번째 수혈을 받으면서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결과도 좋았습니다.


다음날 입원실로 수술을 집도한 지정의사 선생님이 찾아와 수술 결과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수술은 아주 잘 됐어요. 림프절에 전이도 없고 암세포에 박아 두었던 2개의 핀도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 정밀 조직 검사는 2~3주 걸리니까 완전관해인지는 다음 외래 때 얘기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던 남편은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 전이가 안 되었다는 말에 안도했는지 연신 감사합니다를 반복했습니다.


저는 2~3 분의 짧은 설명을 남기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의사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정신이 좀 차려졌습니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작년 가을, 최소 유방암 3기라는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걸린 시간은 7개월. 그동안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의 문턱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언덕을 수없이 오가며 울고 웃었습니다. 막상 수술이 잘 되었다고 직접 들으니 고맙고 감사한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암을 극복한다는 것, 병원의 의술과 독한 항암제의 역할도 있지만 가장 큰 힘으로 나에게 살 의지를 끊임없이 주었던 것은 가족과 친구들의 희생과 사랑이 가장 큰 항암제 역할을 했습니다. 


수술은 끝났지만 아직 갈 길은 멉니다. 방사선 치료도 남았고 표적항암도 3주에 한 번씩 12차를 더 해야 1단계의 치료가 끝납니다(아마도 내년 봄까지). 


"늘 즐겁게 사는 사람은 인생이 술술 잘 풀리기만 해서가 아니다. 살면서 찾아오는 모든 일을 차분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반야심경 마음공부>에서 페이융이 말했듯이 이번 암투병이 그렇습니다. 


아픔과 고통도 차분하게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면 살아갈 인생에 건강한 거름이 됩니다. 이번 암투병은 이미 나에게 큰 스승이 되었습니다. 앞만 보고 바삐 살아온 지난 시간 속에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가치 있는 알맹이를 보는 법, 골라내는 법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암투병의 시간은 지속되겠지만 살아왔던 날들과는 다른, 새로운 이정표를 보며 길을 걷게 될 것 같습니다. 


누군가 암투병을 하고 있다면 이것을 같이 기억해요.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듯이, 이 고통스러운 시간도 자연스럽게 행복이란 시간에 밀려나게 될 때가 올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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