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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 Apr 02. 2024

떠날 수 있는 용기

늘 떠나고 싶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에게

 어린 시절, 교직에 몸 담았던 부모님은 방학이 있었던 덕에 수시로 언니와 나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유적지로 여행을 다녔다. 멋모르고 부모님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꼬맹이 시절에도 차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볼을 간지럽히는 느낌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녹아내릴 것 같은 눈부신 여름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의 고질병,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 시작되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여행한 유럽 18개국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1996년은 지금처럼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하거나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어 선생님이었던 어머니가 교원 연수차 독일에 가게 되었는데 그 틈을 타 아버지와 언니, 내가 독일에 갔고, 한 달 동안 주변국들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가 달달달 떨릴 정도로 추운 겨울날, 각자 자기 배낭을 메고, 두 켤레뿐인 양말을 화장실에서 손빨래해가며 다닌 나의 첫 여행은 그야말로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 주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이 넓고 신기한 세상에 더 많이 가보고 더 많이 경험해 봐야겠다!’


 지루한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틈만 나면 훌쩍훌쩍 떠났다. 사람이 진정 바라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여행을 가는 것이 최우선이 되다 보니 먹는 것, 입는 것, 소유하는 것과 같은 다른 즐길 거리들은 매우 작게 느껴졌다. 지금도 경제관념이 부족하지만 그때는 여행 가고 싶은 일념 하나로 돈을 열심히도 모았다. 내 대학 시절은 학기 중에 악착같이 모아서 방학 때 여행지에 쏟아붓고 오는 것의 반복이었다.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평소에는 무심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여행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라.”


 정말로 그랬다.

 가만히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에 낯선 내음이 실려 오면 떠나고 싶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괴로워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들려오는 말소리가 낯설고,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낯선 곳에서 철저히 이방인이 되고 나면 그제야 요동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평생 이리 살 팔자인가 보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바람에 휘날리는 연처럼,

 갈 곳 없이 둥둥 떠다니는 헬륨가스 풍선처럼

 그렇게 떠돌아다닐 운명인가 보다.'


 나의 본격적인 여행은 학교 졸업 후 시작됐다. 석사 졸업 무렵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길 한 가지 길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그 길에 들어서고 나니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책상 앞에 앉아 책으로만 세상을 보는 삶이 갑갑하고 느껴졌다.


 '세상이 내 안에 들어오게 해야겠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최대한 육로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겠다.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경험하고 피부로 느껴서 두 팔 벌린 내 안에 세계가 가득 차면, 더 멋진 사람이 되지 않을까?'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있고, 공부해서 아는 사람이 있고, 몸소 부딪혀가며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래도 세 번째에 속하는 사람인가 보다. 미련하게 온몸으로 하나하나 배워야만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소속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오래 몸담고 있던 학교를 떠나, 나를 수식해 주는 조직 없이 내 이름 석 자만으로 던져지는 게 그때는 왜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 선택한 거면 어쩌지? 주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은 아닐까? 나중에 후회하면 어떻게 하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들은 나를 상처 준 말이었지만, 무엇이든 쉽게 질리고 한 가지를 꾸준히 하지 못하는 내 인생 자체가 정말로 시행착오인 걸까?'


 안타깝게도 나는 패기 넘치는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움츠러드는 소심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냥 해맑게 꿈과 희망만 가득 안고  떠날 수는 없었다.


 7kg 배낭 하나 메고 3년을 길 위에서 보낼 생각으로 떠난 나의 세계여행은 라오스에서 시작해서 더디게 서쪽으로 이동했다.  


 황톳빛 먼지 색깔로 “싸바이디~”하고 느슨하게 웃는 라오스 사람들,

 내 안으로 침잠했던 미얀마에서의 고요한 시간,

 소중하고 감사한 인연을 만난 태국 방콕,

 엄청나게 큰 자유를 선물해 준 인도 오토바이 여행

 -흙먼지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린 라다크와 잠무 카슈미르는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바이크 타다 교통사고가 나서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리랑카,

 평화롭고, 친절하고, 관대한 중동의 무슬림들. 이다음에 이란 사람을 만났을 때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두 발 벗고 나서서 돕겠다 마음먹었다.

 내가 떠난 뒤 일어난 전쟁과 지진 때문에 마음이 아픈 시리아와 튀르키예. 알레포 시장에서 만났던 동네의 아이들은 지금 살아있기는 할까?



 지난 고통을 잊지 않고 곱씹는 나라 이스라엘,

 과거의 영광과 활력이 아쉬웠던 이집트,

 내가 얼마나 산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게 해 준 네팔 히말라야,



 편안했지만 무료했던 호주까지.


 좋았던 순간, 즐겁고 감사한 순간이 무척 많았지만 실망할 때도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있었고, 외로울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견딜 수 없이 외로웠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여행에서 내가 겪은 모든 순간이 다 그리워질 줄 알았기에 그 외로움마저도 좋았다.


 수없이 많은 밤을 길 위에서 보내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와 있는지, 이다음에 내가 가게 될 길은 무엇인지.


 3년을 생각하고 떠난 여행은 한국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겨 약 2년여 만에 끝내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좀 더 넘게 지난 지금 나에게 무엇이 남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여행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이루고,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면 신화 같은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매우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이따금씩 아주 작은 계기만으로도 희미하게 잊힌 줄 알았던 여행의 순간들이 컷컷의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길, 그 길에서 만난 순박한 미소들, 유명한 유적지나 사원이 아니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시골 마을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때 들이마신 뜨뜻한 바람과 초록 풀내음이 이렇게도 그리워질 줄이야.


 살다가 지칠 때,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을 때, 울타리에 안주하고 싶을 때, 20대 때 여러 개의 바다를 건너며 깊이 새겨 넣은 시간의 조각들이 큰 힘이 되곤 한다. 그때마다 마음속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건넨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 느꼈던 두근거림과 설렘과 두려움을 생각해 봐.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결과는 찬란한 대자유였잖아?’


 그래,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익숙함과 안전함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있다. 실패할까 봐, 지금까지 미약하게 쌓아놓은 것마저 잃을까 봐 무서운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장으로 뛰어들었을 때 느낀 황홀한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마다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기꺼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다.


나를 믿고, 나를 이끌어주는 내 삶을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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