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빡빡한 하루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김부장, 김과장, 김대리에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원래는 볼 생각이 전혀 없었던 컨텐츠였다. 제목부터 세속의 향기가 가득한, 그냥 그저그런 드라마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드라마가 재밌다는 호평이 쏟아졌고, 그래서 그냥 별 생각없이 그냥 재밌는 컨텐츠 하나 봐볼까 하고 넷플릭스를 켰다. 류승룡, 명세빈 두 주연배우와 조연들의 훌륭한 연기에 즐거웠고 그리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 지금, 우리에게는 서울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대신 '김낙수'라는 사람만이 남아 있다. 성공이란 두 글자를 눈 앞에 달고 그 외의 것들은 돌아보지 않은 채, 더 높은 자리를 얻고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달려가던 우리네 가장들의 이야기
아마 이 이야기는 70년대 X세대들에게 큰 울림을 줬을 것이고, 어쩌면 강해보이는 집안의 아버지들의 마음의 벽을 속절없이 허물고 무너뜨려 엉엉 울게 했을 수도 있다. 김부장처럼 살아왔고, 현재 김부장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많은 김부장들. 살날은 쇠털같이 많이 남아있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식구들도 있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막막한 현실과 부딪히고 있는 우리네 가장들
아직은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나도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고, 그리고 현재, 나의 신입시절 대단해 잘 나갔던 선배들이 지금 겪고 있는 이야기기도 하다. 빠른 승진으로 팀장이 되고,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선배들은 어느 날 회사에서 퇴사통보를 받고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몇몇 분들은 운좋게 다른 좋은 자리를 찾아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시지만 그 자리도 여전히 불안하다. 또 다시 임원으로 살면서 언제 또 다시 회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함. 재태크를 잘해서 생계걱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40대 후반, 혹은 50대라는 나이는 아직 일을 놓고 집안에만 있기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너무 많다.
김부장, 나와는 세대도 성별도 그리고 시대의식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회에서 성공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는 것. 그래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내면을 채우기 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성공을 탐하면서 남보다 먼저 승진하고 남보다 먼저 팀장이 되고, 남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나도 그랬었다. 내가 잘나가는 맛에 살았다.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는 김부장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그것이 '나의 행복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바로 팀장으로 고액연봉을 받고 이직한 직장에서 퇴사하게 된 것. 퇴사의 이유는 다시 한바닥을 써도 모자라겠지만 그것은 그 동안 잘 나가던 나의 인생에선 큰 실패였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했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고, 결혼도 일찍하고 누가 보기에도 괜찮은 삶이었고 나의 가치를 더 인정받기 위해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연봉을 탐했고, 그러다 고꾸라졌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보다 외면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내 발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며 큰 상처를 입었다.
회사를 나온건 내 선택이었지만, 1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다 하루 아침에 집에만 있는 생활은 나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가져왔다. 경제적인 수입이 없어졌고, 그리고 내 존재가치를 내 스스로 증명하지 못해 불안과 상실에 시달렸다. 김부장이 회사를 나오기 직전 겪었던 불안증세도 있었고, 나의 경우는 너무 무기력해서 그저 집안 침대에 틀어박혀 몇몇 예능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시간만이 현재의 고통을 잊고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냈고 어쩌다 지금의 회사에 운좋게 합격하여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한번 나를 타격했던 정신적 충격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과 그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유능감에 이미 균열이 간 상태였고,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회사에서의 업무와 문화에 적응을 하면서 힘들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한 번 균열이 간 나의 마음은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회복중인지 모른다.
인생에는 나쁜 일 만도 없고 또 좋기만 한 일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 나쁜 일만은 없고, 또 좋은 일만은 없다. 고액 연봉에 팀장이 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결국 내 발로 그 회사를 그만두는 나쁜 일로 이어지기도 했고, 그 나쁜 일은 기존엔 생각지도 않았던 하지만 괜찮은 선택지인 현재의 회사로 이어졌으며, 김부장처럼 더 높이, 더 많이를 원하던 나에게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타이틀이 아닌 그것을 빼고도 행복한 나를 생각하고 돌보게 만들었다. 바로 드라마 속의 김부장이 퇴사 후에 진정으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처럼.
예쁘고 잘생기고 똑똑해야 하며, 공부도 잘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강한 한국사회.
어떻게 보면 그런 무의식적인 사회적 압박과 치열함이 지금의 선진국 한국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치열하게 갓생을 살고, 도태된 자에게는 게으르다, 나약하다 손가락질 하며,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에게는 자기 관리를 못한다며 혀를 차는 사회. 존재 그 자체로서 사랑받지 못하며 어떠한 '조건'을 달성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사회.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것을... 금수저 집안에 연예인 같은 외모를 타고난 건 아니지만 '서울'에서 괜찮은 머리와 외모를 갖고 태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이루면서 큰 어려움 없이 살았고, 내 노력이 아닌 것들로 이 경쟁적이고 치열한 사회에서 꽤 혜택을 누리고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나 나도 피해가지 못한 것은,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높게 올라가야 행복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떠한 조직에서 남이 입혀준 옷을 입고 그게 처음부터 나의 것인양 좋아하다가 그 옷을 벗고 나서야 내 옷을 찾는데 원래의 내옷은 어딨는지, 없으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 이게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김OO 들이 마주치는 현실이다.
얼마 전, 다른 회사에서 임원직을 맡게 된 전 회사 동기를 만났다. 그리고 그 친구 외에도 나의 많은 동기들은 모두 굴지의 회사들에서 잘 나가는 중이다. 한 회사에서 한 직군을 대표하는 리더로서,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며 멋있는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나였다면 같은 곳에서 시작했으나 지금은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나의 현재와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행복이 아님을 알게 된 지금은 정말 순수하게 온 마음을 다해 대단한 성과를 이룬 친구들을 축하해 주고 있다.
극 중에서 김낙수가 김부장을 보내주었던 그 어느 밤처럼, 어느 날 나의 맘속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렸던 나의 성공한 모습, 행복인줄 알았던, 사회가 만들어냈으나 나의 행복인줄 알았던 그 무엇인가를 보내주고 진짜 나를 채우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회사에서 마냥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추구하려고 무리하게 애쓰거나 달성하지 못했다고 속상해 하는 일은 없을 거란 것이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다른 가치를 더 채우면서, 내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다른 가치들을 더 챙기면서 앞으로의 선택을 할 것이란 것이다. 위로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지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덜 가지더라도 나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 수 있는 삶을 원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회사에서의 경쟁에 아파하고 앞으로의 나날들에 불안해 하며 진짜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한국의 많은 김부장들, 그리고 앞으로 김부장이 될 많은 평범한 회사원들. 그 중의 한명으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인생들을 응원한다. 부디 앞만 보고 남이 만들어준 옷만 입고 달리지 말고, 나의 옷을 만들어 입고 나에게 선물을 주며 앞으로의 나날들을 함께 살아가기를 응원해본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최종화의 마지막 장면은 '김부장 이야기'가 아니라 아래와 같이 고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