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기획에 관하여-
삶은 기획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획’ 그 자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에도, 새로운 모임에서 나를 소개하는 것에도, 여행을 떠나는 것에도, 심지어 이번 주말을 어떻게 재밌게 보낼까? 라는 일상적인 고민까지도, 나는 삶의 모든 부분에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획, 그 중에서도 예능 컨텐츠 기획에 있어 우리 나라 최전선에 서 있는 두 명의 PD가 있다. 이 둘은 No1.이라는 수식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만들어내는 컨텐츠와 일하는 방식, 철학에 있어서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호 PD는 영원히 젊게 사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청년이다.
익숙함, 기존의 성공방식에 타협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여 기존엔 듣도보도 못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 악기연주로 치자면 마장조, 나단조, 바단조로 음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해금과 바이올린, 오카리나를 조화롭게 연주하며 심지어는 병, 그릇, 나무 막대기, 주방칼로도 난타를 하며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와 같다.
김태호 PD의 대표작인 '무한도전'에는 정해진 포맷이 없다. 매주 새로운 아이템으로 도전하는 유재석을 필두로 한 자칭 평균이하의 여섯 남자들이 고정된 멤버로 존재할 뿐이다.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사회 이슈를 거부감없이 시청자들에게 제시하기도 했는데, 환경문제를 예능으로 유쾌하게 풀면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기고 하고 무한상사를 통한 사회풍자나 하시마섬, 독도와 같은 굵직한 소재를 다루기도 했다. 때로는 멤버간의 케미를 활용한 추격적을 벌이거나 무인도에서의 서바이벌 게임과 같은 순수 예능 컨텐츠가 나오기도 한다.
최근 김태호 PD는 무한도전 이후의 1년간의 안식년을 끝내고 '놀면 뭐하니?'라는 무한도전보다 자유도가 높은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지금이야 '놀면 뭐하니?'가 성공한 예능으로 자리 잡았지만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초반의 몇 회분은 릴레이 카메라 형식으로 카메라를 받은 사람이 각자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었는데 이 때만 해도 다른 방송에 비해 신선하다거나 재밌다는 평은 듣지 못했다. 김태호라는 거물의 방송 제 2막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대감는 매우 컸고, 그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그렇게 기대감을 점차 잃어가던 중 유플래쉬 (feat. 드러머 유고스타)가 등장했다.
무한도전 프로레슬링 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마추어 레슬러로 더 익숙한 손스타가 유재석의 스승을 자처하며 유고스타라는 드러머를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유재석의 드럼을 시작으로 음악릴레이를 시작하여 각 뮤지션의 네트워크를 거치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음악이 완성되어 과정을 그린다. 유재석의 8비트 드럼을 시작으로 총 5곡의 노래가 만들어졌는데, 시작은 미약했지만 각 곡들은 아티스트 한 명 한 명을 거칠때마다 각 음악은 각각 다른 방식의 개성을 뽐내며 멋지게 완성되어 갔다.
그 이후에도 '놀면 뭐하니?'는 트로트 대형신인 유산슬을 필두로 싹쓰리, 환불원정대 등의 성공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MSG워너비를 프로듀싱하는 유야호를 등장시켜 또 한 번의 대형신인그룹을 만들 것이 기대되고 있다.
감히 예상하건데, 김태호 PD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유재석의 부캐를 탄생시킬때마다 치열하게 기획회의를 하고 방송을 구성하겠지만 그 모든 것의 결과를 정해놓고 촬영을 진행하지는 않는 것 같다. '유플래시' 처럼 기획자의 손을 떠나서 완성되는 곡들이나 MSG 워너비처럼 유재석의 감에 의존한 그룹결성, 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합류하여 만들어내는 유재석과의 케미 등 시시각각 변하는 변수들과 상황을 수용하고 이를 한데에 버무려 최종적으로 프로그램을 완성한다. (물론 이것까지 모두 예상하여 기획했다고 한다면, 연출자들의 치밀함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다.)
보통의 프로그램들은 짜여진 틀과 대본이 있다. 몇몇 출연자의 애드리브나 돌발상황은 있겠지만 '놀뭐'와 같이 결과를 정해놓지 않고 출연자들에게 맡기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다. 이렇듯 정해진 결과가 없는 상황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드는 시도는 청년과 같은 용기와 무모함이 없이는 하기 힘들다. 프로그램 제목은 '무한도전'에서 '놀면 뭐하니?'로 바뀌었지만 김태호 PD는 자신의 페르소나 혹은 환상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유재석과 함께 무모한 도전을 계속 하고 있다.
나영석 PD는 성공이 무엇인지 아는 원숙한 중장년이다.
김태호 PD가 겁없이 도전하는 청년이라면 나영석 PD는 성공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실현할 능력도 있는 원숙한 중장년이다. 나영석 PD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기존과 똑같진 않은, 조금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든다. 대중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을 베이스로 깔지만 약간의 변주를 통해 조금은 신선하지만 그렇다고 낯설지 않은 대중적인 컨텐츠를 만든다.
예를 들어 꽃보다 할배는 기존 '여행이 젊은이들의 것' 이라는 통념을 뒤집어 60,70대 할아버지들의 배낭여행을 소재로 하여 기존 여행컨텐츠에서 주지 못한 '여행과 삶에 대한 새로운 메세지'들을 던지며 우리에게 새로운 여행 컨텐츠를 선물했다.
삼시세끼는 천편일률적으로 스튜디오에서 펼쳐지는 쿡방이 아닌 새로운 환경, 강원도 정선이나 섬마을을 배경으로 단순한 쿡방을 보여주기보다 그 환경이 주는 신선함과 더불어 등장인물들 간의 케미에 더 집중한다. 윤식당과 스페인 하숙 역시 쿡방이 기본으로 깔려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의 셰프가 아닌 배우들의 식당/하숙집 운영이라는 도전, 그리고 한국음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시각, 평가를 보여줌으로써 또 한 번의 변주를 시도했다.
일전에 '유퀴즈 온더 블록'에서 나영석 PD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 자신은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기존의 잘하는 것에서 10~20% 정도의 새로움을 추가하여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컨텐츠를 만든다고 한다. 음악으로 치자면 김태호 PD처럼 악기로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르는 막대기와 드럼통, 책상과 같은 소재를 사용하기 보다는 기타나 건반과 같은 익숙한 악기를 베이스로 하되 조금은 낯설고 새로운 악기를 추가하여 연주를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익숙한 곡에서 장단조를 살짝 바꿔 선보이거나 난해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새로운 해석을 더해 익숙한 듯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다.
그의 인터뷰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목은 '프로그램은 무조건 잘되어야 한다' 대답이었다. 단편적으로는 듣기엔 한 성공한 PD의 여유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말은 그의 무거운 어깨를 대변한다. 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 위해 기획/연출/촬영/편집/방송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이 많은 사람들이 투자하는 인생의 시간을 고려하면 프로그램은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PD의 이 말은 부모님, 자식, 형제를 모두를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의 책임감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나라 두 스타 PD를 surfer에 비유하자면 김태호 PD는 어떤 바다에서 어떤 종류의 파도와 서핑을 할지는 미리 구상하긴 하지만 이후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바람과 파도에 본인과 출연진의 몸을 맡기며 중심을 잡는 도전적인 서퍼가 연상된다. 반면 나영석 PD는 바다에서 서핑을 하기보다 본인이 만든 세트장에서 서핑을 즐기지만 그 세트장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청년이 아닌 꽃할배이거나 세트장이 기존에 우리가 생각지 않던 장소, 예를 들면 스페인의 작은 마을이나 순례자의 집(Albergue) 등으로 설정하며 익숙하지만 신선한 재미를 준다.
김태호와 나영석. 이 두 사람은 서로의 각자 다른 방식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이뤘다.
둘 중 어떤 기획이 더 좋은 기획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한민국에 이렇게 성향이 다른 훌륭한 예능PD가 2명이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두 분의 프로그램의 팬으로써, 한 명의 시청자로서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더 많이 웃게할 두 분의 멋진 활약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