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히 차려입은 재벌 2세가 백지수표를 꺼내 서명한 후 상대방에게 건네는 모습.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죠. 그런데 과연 백지수표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작품 속 극적인 연출을 위한 허구일 뿐일까요? 오늘은 이 백지수표의 정체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정답부터 말하자면 백지수표는 실제로 존재해요. 백지수표란, 수표를 발행하는 사람의 이름과 도장만 기재되어 있고 금액을 비워 둔 수표를 의미합니다. 즉, 수표를 받은 사람이 쓴 금액만큼 지급인이 지불을 보장해 주는 수표인 것이죠.
백지수표는 필요한 기재 사항이 모두 적혀 있지 않아 마치 비공식(?)적인 문서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요. 사실 백지수표도 일반 수표처럼 발급 과정을 통해 유통되는 엄연한 공식 수표입니다. 비어 있는 부분을 기입한 후 수표를 발행한 날짜에 소급하면 효력이 생기는 것이죠.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백지수표 금액란에 얼마만큼의 액수를 쓰든 돈을 무제한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만약 발행인의 계좌 잔고보다 높은 금액이 적혀 있다면 출금이 불가능하겠죠.
배구선수 김연경은 과거에 자신을 영입하려는 중국 구단에게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방송에서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죠. 축구선수 박지성 역시 2002년 월드컵 이후 백지수표 제안을 두 번이나 받았다고 고백했어요.
표면적으로 백지수표는 받은 인물의 능력을 인정하고, 원하는 만큼의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의미로 보이는데요. 사실 외국에서 백지수표는 오히려 고도의 협상 전략에 가깝습니다.
한 구단이 선수A를 영입하고자 백지수표를 건넸다고 가정해 볼까요? 선수A는 백지수표를 받았더라도 구단이 원하는 금액을 알 수 없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오히려 구단이 예상한 금액보다 적게 금액을 적을 수 있습니다. 만약 선수A가 구단이 예상한 금액보다 더 높게 적더라도, 구단은 금액을 다시 협상하는 쪽으로 이끌어 갈수도 있고요. 여러모로 구단에게 더 유리한 전략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즉, 유명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등이 종종 받았다고 들려오는 백지수표는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수표 실물을 실제로 받았다기보다는, ‘우리는 당신과 정말 함께 하고 싶다'라는 적극적인 영입 의사를 전하는 퍼포먼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아쉽게도 백지수표는 주로 외국에서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미국의 경우 개인이 은행에 계좌를 만들면 계좌주의 이름, 계좌번호 등이 인쇄되어 있는 ‘수표책’이라는 것을 주는데요. 발행인은 수표책의 빈 금액란과 서명란을 마저 작성하고, 수취인은 이를 은행에 가져가 발행인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구조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서명만 하고 금액란을 비운 수표를 준다면 이게 바로 백지수표가 되는 것이죠. 계좌이체 수수료가 비싼 미국에서는 아직 이러한 수표책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수표책 대신 ‘가계수표’와 ‘당좌수표'라는 것이 존재해요. 가계수표는 금액을 쓰고 서명해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수표를 발행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금액을 쓰지 않고 건넨다면 백지수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가계수표의 경우 발행인의 개인 신용을 토대로 발행 한도가 정해지므로 완전한 백지수표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가계수표의 발행 한도는 일반 수표보다도 낮은 500만 원 이하)
반면 당좌수표는 계좌 잔고를 넘어선 막대한 금액으로 발행이 가능하지만, 가계수표와 달리 법인 소유자나 사업자만 개설 가능해요. 또한 일반 보증수표와 달리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지 않기 때문에 부도 처리가 될 수 있어요.
이러한 한국의 수표 정책 특성상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온전한 백지수표가 통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