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 장비를 고쳐주고 온 영업사원

23편

by 김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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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사원에게 경쟁사 장비는 눈엣가시입니다.

고객의 실험실 메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타사 로고를 보면, 속으로는 '언젠가 내 제품으로 밀어내리라' 다짐하곤 합니다.

하지만 며칠 전, 지방의 한 국립대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그 경쟁사 장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패배를 인정해서가 아닙니다. 그 장비를 '고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매뉴얼이 없어서 연락드렸어요"


대학원생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한달음에 달려간 현장.

막상 가보니 문제의 장비는 우리 제품과 스펙이 유사한 타사 모델이었습니다.

사용법을 몰라 램프가 꺼지고 온도가 튀는 상황.


보통이라면 "저희 제품이 아니라서요" 하고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는 학생분들을 보며 저는 경쟁사 장비의 매뉴얼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습니다.

제조사는 달라도 기술의 원리는 통하니까요.


"선생님, 이 모델은 램프 수명이 다 되면 안전 차단이 걸립니다. 설정값을 이렇게 바꾸시면 당장 쓰실 수 있습니다."


경쟁사 장비가 다시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실험실 구석에서 깨어난 2년의 시간


그런데 진짜 반전은 그때 일어났습니다.

안도하는 학생분들 뒤로, 실험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꺼져있는 장비 두 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우리 회사의 건조기와 쉐이킹 인큐베이터였습니다.


"아, 저거요? 2년 전에 야심 차게 구매했는데, 랩 내부 사정으로 담당자가 바뀌면서 한 번도 못 쓰고 방치됐어요."


2년. 장비가 가장 쌩쌩하게 돌아가야 할 골든타임이 먼지 속에서 멈춰있었던 겁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비의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전원 코드를 연결하고, 굳어버린 댐퍼를 풀고, RPM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렸습니다.


위잉- 2년 만에 장비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사실상 새 장비나 다름없는 녀석이 힘차게 돌아가는 순간, 학생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우와, 이거 되는 거였어요? 당장 내일부터 실험 걸어도 되겠네요!"




물건을 파는 것보다 중요한 것


돌아오는 길, 제 손에는 신규 주문서 한 장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했습니다.

경쟁사 장비를 고쳐주고, 잊혀졌던 우리 장비를 살려내고, 무엇보다 학생분들의 막막함을 해결해 주고 왔으니까요.


영업은 경쟁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연구를 멈추지 않게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하루였습니다.


오늘도 저는 매뉴얼 한 장 들고 현장으로 갑니다.

어디선가 멈춰있을 누군가의 연구를 다시 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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