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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칼 Jan 26. 2024

중세 바이에른 걷기

2024년 1월 6일(토)(3일째)-뉘른베르크에서 라이프치히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된 건지 연거푸 들이킨 알코올 때문에 속이 안 좋은 건지 어제처럼 오늘도 새벽 3시 30분경에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아침 6시 20분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다들 일어나서 조식 먹을 준비를 했다. 나가기 전에 어머니와 영상 통화를 했는데 몸 상태가 좋은 건 아니라서 걱정이 되었다. 1층 식당으로 내려와서 조식을 즐기는데 종류는 많이 없어도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맛있게 먹었다. 특히 소시지가 맛있어서 여러 번 먹었고, 아이는 생애 첫 와플 만들기에 성공해서 2번이나 만들어 먹었다. 정신을 또렷이 하기 위해 카푸치노, 라테 마키아토와 더블 샷 에스프레소까지 커피를 또 들이켰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답게 우리 가족은 어디서나 푸짐하게 먹는 듯했다.


구도심 걷기


객실로 돌아와 잠시 쉰 다음 체크 아웃을 하고 짐을 프런트에 맡기고 나왔다.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제는 나치의 잔해를 보았다면 오늘은 구도심을 보는 날이었다. 첫 목적지인 성 로렌츠 교회(St. Lorenzkirche) 신성로마제국의 자유 도시였던 뉘른베르크의 성당으로 현재는 루터 교회에 속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게 훼손되었지만 복원되었으며 루터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 잡고 있다. 높이 81m의 고딕 양식으로 1270년에 짓기 시작하여 1400년에 본당이 완성되고 1477년에 최종 완공되었으며 종교 개혁 시대에도 시민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그 모습이 잘 구현되어 있는 멋진 교회였다. 교회 입구 앞에 미덕의 분수가 있는데 7명의 여신에게서 물이 나오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경건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성 로렌츠 교회


나와서 조금 더 걸으니 뉘른베르크 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가 나타났다. 벽돌로 지어진 고딕 건축의 멋진 모델 중 하나로 1352년에서 1362년 사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4세가 지었다. 역사를 보면 1349년 흑사병 발발 이후 뉘른베르크의 유대인들에 대한 가톨릭의 학살이 일어났는데, 이후 카를 4세가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것이 성모 성당이 되었다. 이 교회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다가 1953년에 복구되었다. 건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356년 황금 황소를 기념하는 기계 시계인 멘라인라우펜(Männleinlaufen)이었다. 1506년과 1509년 사이에 설치되었다는데 황제와 선거인단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매일 정오가 되면 황제와 선거인단이 움직이는 인형극이 펼쳐졌다. 이건 1356년 카를 4세가 뉘른베르크 의회에 제후들을 소집해 금인칙서(Golden Bull)를 반포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금인칙서는 선제후 7명(마인츠 주교, 쾰른 주교, 트리에르 주교, 보헤미아 왕,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팔츠 백)이 회의를 해서 대관식은 아헨에서 거행하고 마인츠 대주교가 마지막 투표권자라는 내용이 있다.


외관이 아름답던 프라우엔 교회


광장 맞은편에 있는 아름다운 분수, 쇠너 브루넨(Der Schoene Brunnen)은 프라우엔 교회 앞에 있는 화려한 첨탑 모양의 분수대로 1930년대 후반 세워졌다. 높이는 19m에 달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금빛으로 꾸며진 분수의 화려함 중 하나가 조각상인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요한 등의 조각 작품이 있다. 광장을 뒤로하고 가니 성 로렌츠 교회와 쌍둥이 같은 성 제발트 교회가 나왔다.


정교한 쇠너 브루넨


성 제발트 교회(St.Sebalduskirche)는 12세기에 지어졌으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요소를 결합하고 있는 교회로 현재는 개신교 복음 교회로 있다. 하지만 성상이나 벽화 등은 그대로 있으며 교회의 외관은 화려한 조각과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중앙 제단은 14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성 제발트와 그의 동료 성인들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 뒤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성 제발트의 금박 석관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내부에 전혀 난방이 되지 않아서 오래 있지는 못해서 천천히 둘러만 보고 나왔다.


성 로렌츠 교회와 쌍둥이 같던 성 제발트 교회


뉘른베르크를 조망할 수 있는 뉘른베르크 성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오르막 길을 올라갔다. 눈앞에 보이며 다 왔다는 걸 알려주는 아펜펠센(Affenfelsen) 타워는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14세기 고딕 양식의 타워로서 1327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134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타워는 44m 높이에 있으며, 3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타워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으며, 강과 도시의 아름다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타워의 이름은 독일어로 '원숭이 바위'를 의미하는데, 옛날 타워 근처에 원숭이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뉘른베르크 성에서 바라본 시가지


뉘른베르크성(Nürnberger Burg)은 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과 부르크크라펜(Burggrafen)성으로 나뉘어 있다. 1140년에 콘라드 3세가 머물 궁으로 카이저부르크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다른 독일 문화재처럼 큰 피해를 받았지만 전후 복구를 하면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니 한눈에 가득 찼다. 반대편으로 돌아 내려온 우리는 뒤러 하우스로 향했다. 중세 시대의 모습으로 잘 복원된 거리를 걷자니 꼭 옛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성에서 내려와 들어온 구도심


터널을 지나 나타난 뒤러 하우스(Albrecht Dürer-Haus)는 카이저부르크 성 바로 앞에 위치한 저택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얀 벽에 목조가 드러난 아름다운 모습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알프스 이북을 대표하화가인 뒤러가 1509년부터 1528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집이다. 뒤러뿐만 아니라 그의 자제와 어머니, 아내도 함께 살았던 곳으로 그가 살았을 당시 내부 모습을 재현해 놓아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복원 작업을 통해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뒤러가 살았던 집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페그니츠강에 놓인 여러 다리를 보면서 도시의 깊이를 더욱 느껴보았다. 대표적인 다리인 막스브뤼케(Maxbrücke)는 강을 가로지르는 석조 아치 다리로서 14세기 중반에 처음 지어졌으며, 1810년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를 기리기 위해 막스브뤼케로 이름이 바뀌었다.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길이는 120m, 너비는 13m이며 다리의 난간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헨커브뤼케(Henkerbrücke)는 나에게 더 인상적이었던 다리로서 처형자들이 오갔던 다리로 유명하며, 바로 이어져 있는 목조 다리인 헨커슈텍(Henkersteg)은 사형집행인의 다리로 이곳이 예전에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다리를 지나 기차 시간이 오후 6시라서 그전에 카페에서 몸을 녹이고자 다시 시가지를 정처 없이 걸어갔다. 딱 정해놓고 카페를 찾지 않고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북적이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뉘른베르크에서의 마지막 한때를 즐겼다.


옛날에는 무시무시한 다리


원래 멀리 떨어진 전범 재판소까지 다녀올까도 싶었지만 무리하는 것 같아서 그곳은 넘어가기로 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Nuremberg Palace of Justice)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전범(戰犯) 즉, 전쟁 범죄에 대해 다룬 국제 군사 재판이 열린 곳이었다. 우리에게 전범 재판은 극동국제군사재판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건 흔히 도쿄 전범 재판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뉘른베르크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다루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4개국이 독일이 자행한 전쟁 범죄를 처벌하게 위해 열렸는데 24명의 기소인 중에서 자살과 병사를 한 2명을 제외하고 22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2명은 사형, 3명은 종신형, 4명은 유기형, 3명은 무죄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었다.  


제대로 된 글뤼바인 한 잔


카페에서 나와 성모 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산책하는데 글뤼바인(Glühwein) 파는 곳이 있었다. 뱅쇼와 비슷하게 레드와인에 생강, 계피 등을 넣고 뜨끈하게 끓인 음료로 한 번은 맛보고 싶었다. 아이에게 주문하라고 말하니 바로 가서 주문하는 게 재빨라서 조금 놀랐다. 4유로인데 컵을 반납하면 3유로를 돌려주는 시스템이어서 먼저 7유로를 결제했다. 일단 한 입 마시니 알코올이 확 올라오는 게 집에서 만들어 먹던 뱅쇼와는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집에서는 일부러 푹 끓이니까 알코올이 날아갔는데 진짜배기는 달랐다. 찾아보니 뉘른베르크에서 생산된 글뤼바인이 독일의 90% 이상 점유하고, 알코올 함량은 7%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한 잔 사서 아내와 둘이 야금야금 나눠 마셨다. 알딸딸하면서 달콤한 글뤼바인이 뱃속을 따뜻하게 달래주었다.


맛과 인테리어 모두 훌륭한 식당


아내 생일인 오늘 저녁 식사는 뉘른베르크의 맛집에서 축하하기로 했다. 기차 시간 때문에 다소 이른 오후 4시에 생각해 놓은 식당으로 갔다. 예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식당 안은 전통적인 독일 식당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슈바인학센과 뉘른베르크 소시지 모둠, 샐러드를 요리로 주문했다. 그리고 켈러 맥주와 지역 필스너 맥주, 포도 주스를 시켜서 만찬을 즐겼다. 우리나라의 족발과 비슷한 학센 요리는 돼지를 의미하는 슈바인(Schwein)과 관절을 의미하는 학세(Haxe)의 합성어로 돼지 발목 윗부분, 우리로 치면 족발에 해당하는 부위를 구워서 요리한 전통 요리로서 한 번 삶았다가 껍질을 튀긴 게 특징인데 바삭한 맛과 안의 촉촉한 고기 맛이 어우러졌다. 그래도 나에겐 우리나라 족발이 더 쫄깃하고 입에 맞는 듯했다. 뉘른베르크 소시지는 어젯밤에도 먹고, 오늘 아침과 저녁까지 계속 먹게 되었는데 나중에 생각날 것 같았다.


실패가 없던 뉘른베르크의 식사


으깬 감자가 쫀득하고 너무 맛있어서 아내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먼저 아이가 종업원에게 너무 맛있다며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물어봤다. 감자를 으깨고 거기에 빵가루나 달걀을 섞은 다음 둥글게 치대서 찐다고 알려줬다. 아까 글뤼바인을 주문할 때도 그렇고 이제 여행에서 대화 담당은 아이가 맡아도 될 것 같았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아내와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족, 인생, 여행, 미래의 가치관에 대해 나누며 생각을 더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이 있기에 우리가 더욱 끈끈해지는 힘을 얻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다.


어둑해진 거리가 멋진 뉘른베르크


주위가 어둑해질 때 식당을 나와서 이제는 길을 외워버린 시가지를 지나서 호텔을 찾아 짐을 찾은 다음 중앙역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오고, 어딘가를 갈 많은 사람이 붐비는 역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우리를 라이프치히로 데려다줄 기차가 올 6번 플랫폼에서 기다렸다. 이때 아이와 나는 슬로 파이트 장난을 치다가 내 무릎에 오른쪽 눈 위를 맡아서 울음을 터트렸다. 달래면서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동안 기차가 와서 이번에는 우왕좌왕하는 일 없이 정확하게 탑승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뮌헨에서 출발해서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베를린 등을 거쳐 독일 북쪽 도시 함부르크까지 가는 기차였다. 나름 만석이지만 어제보단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니어서 좋았다.


라이프치히를 향해 달리는 기차


2시간을 달려 이번 여행의 세 번째 도시, 라이프치히(Leipzig)에 도착했다. 괴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만한 작품 '파우스트'에 나오는 도시, 라이프치히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의 라이프치히를 나는 찬양한다. 작은 파리라 할 만큼 사람들이 교양이 있다." 사실 나는 독일문학, 괴테에 관심 있는 편이 아니어서 그걸 생각하면서 도시를 방문하지는 않았다. 독일의 분단 당시 동독의 주요 도시로서, 그리고 독일문학보다 독일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바흐를 생각하며 방문했다. 작센주의 중심 도시였지만 동독으로 분리되면서 도시 규모가 작아졌지만 지금은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도시이기도 했다. 독일의 분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관리하던 지역이 동독으로 분리되고, 다른 연합국이 관리하던 지역은 서독이 되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로 지냈지만 1989년 동유럽 혁명이 일어난 시발점이 바로 여기였다. 1989년 10월 9일에 일어난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시위가 드레스덴, 동 베를린 등 다른 동독 도시들로 전파되었고 얼마 뒤 철통 같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뜨리고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되었기에 이 시위가 독일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도착


이미 저녁 8시가 넘어서 우리는 호텔 체크 인을 하고 내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아침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떨어진다고 해서 제대로 한겨울을 느낄 듯했다. 여행 3일 차인데 내내 술을 마셔서 일단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금주하기로 자신과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아내가 유명한 아우어바흐 술집을 예약해 놔서 지키지 못할 약속 같았다. 나와 아이는 샤워를 하고 탄산수를 끓여 한국 컵라면을 야무지게 먹고 하루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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