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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칼 Jan 29. 2024

클래식 음악의 수도

2024년 1월 15일(월)(12일째)-빈

빈에서 맞이하는 첫날이 밝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활기찬 도시의 공기를 만끽하게 부족함 없는 아침이었다. 어제 중앙역 마트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삶은 달걀로 간단히 식사를 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수준의 샌드위치는 차가워서 맛이 없었고, 나와 아내는 커피 생각이 간절하긴 했지만 물을 1.5L 한 병만 사 와서 커피 끓이기에는 물이 모자랐다. 일단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영상 통화를 마치고 한껏 시원한 겨울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빈의 거리로 나갔다. 먼저 첫 번째 목적지로 숙소 근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으로 걸어갔다.


흔한 유럽의 아파트 맨션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17세기 후반에 지어졌으며,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궁전 중 하나였다. 두 개의 궁전이 있는 독특한 형태인데 상궁(Upper Belvedere)은 1697년부터 1723년까지 튀르크 전쟁의 영웅인 사보이 공자 외젠이 지었으며, 하궁(Lower Belvedere)은 1714년부터 1723년까지 외젠의 동생인 카를과 그의 아내인 마리아 안나 아우스트리아가 지었다. 상궁은 궁전의 중심 건물로서 정면 상단에는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고, 아래에는 사보이 가문의 문장이 있다. 내부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토 무크 등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는 이곳에 유명세를 더해주었다. 하궁의 내부는 상궁보다 소박한 분위기로서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었다. 찬바람이 불었지만 푸른 하늘이 보여 빈의 하루를 시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빈의 상쾌한 아침


궁전에서 나와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희생된 소비에트 병사 위령탑을 지나 카를 성당으로 갔다. 카를 성당(Karlskirche)은 바로크 양식으로 1713년부터 1737년까지 요하네스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르라흐와 요제프 에마누엘 피셔 폰 에르라흐가 설계하고 건축했다. 18세기 초반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가 빈에서 사라진 것을 기념하여 건축된 성당의 이름 역시 역병의 수호성인인 성 카를로 보로메오에서 따왔다. 돔은 72m 높이로, 빈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중 하나이고, 첨탑은 45m 높이로 돔과 함께 성당의 화려한 외관을 완성했다. 규모는 작지만 꼭 독일 베를린에 있는 베를리너 돔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에겐 매우 낯선 소비에트 위령탑
불기둥을 연상시키는 첨탑이 멋진 성당


성당을 지나 우리는 트램과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를 건넜다. 도로를 건너기 전에 알베르티나 현대 미술관(Albertina Modern)과 빈 음악협회(Musikverein Wien) 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더 쭉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나타나는 도로가 바로 익히 말하는 링(Ring)이었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링(Ring) 안을 둘러보는 것으로,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빈의 중심부를 도는 도로가 반지 형태여서 링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본래 성벽이 있던 자리로 프란츠 요제프 1세 당시 순환 도로로 만들어져 지금의 모습을 띄게 되었는데 총길이는 5.2km에 달했다. 처음에는 성벽이 남아있나 싶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여기가 링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국립 오페라극장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도로를 건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독일 베를린과는 또 다른 다양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모습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신호등이 있다면 또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알베르티나 현대 미술관과 빈 음악협회
함께 가는 신호등


빈 국립 오페라극장(Wiener Staatsoper)은 이곳이 왜 클래식 음악의 수도인지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2,200여 석 규모 극장의 시작은 1861년부터 착공하여 1869년에 지어진 오페라 하우스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가 참석한 가운데 빈 궁정 오페라로 개관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이후 원래 모습을 거의 유지한 채 복원되었다. 이곳은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Wiener Philharmoniker)이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베를린 필하모니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현악단으로 드높았다. 역대 지휘자 중 알만한 사람으로는 구스타프 말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이 있다. 한국인으로는 정명훈 지휘자가 지휘한 적도 있었다.


여기가 바로 클래식 수도


오페라극장 뒤편 도로 건너편에 커피와 디저트를 공급해 줄 카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의 역사가 깊은 빈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카페 자허였다. 카페 자허(Cafe Sacher)가 유명한 것은 자허 토르테(Sacher Torte)때문인데 는 빈을 대표하는 디저트로 초콜릿을 넣어 반죽해 구운 스펀지케이크에 살구잼을 바르고 초콜릿으로 전체를 코팅한 케이크를 말한다. 쌉싸름하고 진한 초콜릿과 상큼하고 달콤한 살구잼의 조화가 일품으로 다른 과일 잼이 아닌 살구잼을 발라야 자허 토르테라고 불렸다. 자허 토르테의 유래는 1832년 우리에게 빈 체제로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 메테르니히가 자신의 요리사에게 디저트 준비를 맡기는데 몸이 안 좋아서 16살이던 수습생 프란츠 자허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후 자허는 빈에 카페 자허를 차렸고, 그의 아들 에두아르트 자허가 카페 위에 호텔을 올렸는데 그게 호텔 자허이며 지금까지 카페와 호텔은 남아 있다. 사실 자허 토르테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가진 디저트가 된 것은 후에 호텔 자허와 에두아르드의 아들이 취직한 데멜 제과점의 원조 논쟁으로 인해 7년간 법정 공방이 이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어찌 보면 둘 다 원조이긴 하나 오리지널의 표기는 호텔 자허가 가져갔다.


그 유명한 카페 자허 방문


우리는 디저트로 자허 토르테와 사과 파이로 볼 수 있는 아펠슈트루델을 시키고, 커피는 아인슈페너와 카페 멜란지를 주문했다. 아이는 따로 메뉴가 딱히 없어서 핫 초콜릿을 마셨다. 기대했던 자허 토르테는 원조이지만 퍼석한 느낌이 나서 생각보다 흡족하지는 못했다. 커피도 카페 문화의 본산답게 기대를 했지만 명성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우리 동네 카페가 더 잘 만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맛이 아쉬웠지만 아이는 맛있다며 싹싹 먹어치웠다.


오스트리아 카페 3대장


카페를 나와서 가는 길에 황실묘지 성당이 나왔다. 황실묘지(Kaisergruft)는 카푸친 수도회 산하의 성당 지하에 모셔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묘지로서 신성 로마 제국 마티아스의 부인 아나 황후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전해졌다. 1618년부터 만들기 시작해 1633년부터 묘지로 사용되었는데 12명의 황제와 18명의 황후를 비롯해 총 145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마지막으로 안장된 사람은 2011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지위에 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그의 부인 레기나 폰 합스부르크이다. 무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오스트리아 절대 왕정의 상징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닐까 싶다. 안장할 때 독특하고 멋진 전통이 있는데 처음에는 황족임을 나타내는 지위를 열거하며 들어가려다가 거절당하고, 두 번째는 직업과 훈장, 직위 등으로 공인임을 나타내고 입장하려다가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본명을 부르며 죄인이 입장한다고 말해야 성당 문이 열리고 관이 입장하는 것이 있다.


이곳에 잠든 수많은 황족들


성당을 지나서 갈 곳은 클래식 음악하면 떠오르는 음악의 천재, 신동이라 일컬어지는 모차르트가 죽음을 맞이한 데스 하우스였다. 모차르트 데스 하우스(Mozart-Sterbehaus) 빈에 있는 주택으로, 1791년 12월 5일 35세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사망한 곳으로 유명한데, 현재 그 건물 자체는 없고 명판으로 이곳이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1790년에서 1791년까지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거주했는데 그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류머티즘열, 폐렴, 뇌졸중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장례 후 시신 수습이 제대로 안되어 현재까지 행방을 몰랐다. 슈테판 대성당 가는 길에 모차르트가 빈에 거주했을 당시 살았던 빈 모차르트 아파트(Mozarthaus Vienna)도 들렸다가 갔다.


그가 죽었던 곳과 살았던 곳


모차르트 아파트 바로 근처가 빈이 자랑하는 슈테판 대성당이었다. 프라하에 성 비투스 대성당이라면 빈은 슈테판 대성당이었다. 골목을 지나가면서도 거대한 첨탑이 보였다.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은 가톨릭 성당으로 빈 대교구를 상징하는 성당이자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중 하나였다. 슈테판 광장에 있는 이 성당은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해서 1258년 빈 대화재 당시 소실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후 1359년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대신 고딕 양식으로 개축했고, 후에 1683년 튀르키예와 1945년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복원되었다. 성당 높이는 첨탑 포함하여 137m에 달하며, 천정 높이는 39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지하에는 카타콤이 자리 잡고 있다. 1782년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1791년 장례식이 치러진 곳으로 유명했다. 일단 앙커우어 인형 시계의 인형들이 전부 나오는 정오가 가까워져서 내부는 잠시 뒤에 입장하고 먼저 시계부터 보러 갔다.


기쁨의 싸대기


바로 근처여서 찬바람을 뚫고 아이 손을 잡고 부지런히 시계 앞으로 갔다. 여행 비수기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앙커우어 인형 시계(Ankeruhr)는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앙커 보험 회사의 두 건물을 잇는 다리 위에 설치된 시계로서 1911년에 완공되었으며, 아르누보 양식의 화려한 외관과 매시 정각마다 등장하는 12개의 인형으로 유명했다. 시계의 중앙에는 둥근 원형의 시계판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12개의 인형이 배치되어 있다. 인형들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등이 있다. 정오가 되어 천천히 인형이 지나가는데 10분 넘게 찍고 있자니 손이 시리고 목이 아파왔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계 인형들


영상을 찍고 나서 다시 슈테판 대성당으로 갔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미사 중이어서 본당 제단으로는 갈 수 없었지만 미사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내부를 전체적으로 유심히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정석적인 유럽의 대성당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감동이 크진 않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흔적이 있기에 다르게 다가왔다. 역사의 재미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에 있으며 서로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정석적인 거대한 유럽의 성당


점심 식사할 때가 되어 아내가 찾아 놓은 슈니첼 전문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우리는 찬바람을 뚫고 서둘러 식당이 있는 쪽으로 갔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는데, 역사가 깊은 곳이라는 것을 식당 안팎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슈니첼과 송아지 간 요리, 드레싱이 독특한 감자 샐러드를 시켰다. 그리고 포도 농장이 따로 있다고 해서 하우스 와인 두 잔과 포도 주스를 주문했다. 주문한 요리가 기대이상으로 맛있어서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대만족한 식당
주관적인 오스트리아 최고의 레스토랑


식사를 하고 나서 성 베드로 성당에 들렸다가 카페 자허, 카페 첸트랄과 더불어 빈에서 유서 깊은 카페인 카페 데멜을 지나갔다. 우리가 걷는 거리가 꼭 마드리드나 파리와 닮아서 대도시 느낌이 많이 났다. 우리는 먼저 13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설립한 고딕 양식 성당으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따라 그린 모자이크화가 유명한 미노리텐 교회(Wiener Minoritenkirche)로 갔는데 문이 닫혀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찬바람과 함께 아쉬움을 삼키고 그다음 여정을 위해 잠시 쉬었다 갈 카페 첸트랄로 갔다. 카페 자허는 아침에 가서 대기가 없었는데 여기는 점심시간 후라서 이미 만석이라 5분 정도 대기를 한 후 입장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느껴지는 아르누보


1876년에 설립 카페 트랄(Café Central)은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했다. 내부는 샹들리에와 대리석 기둥, 벽화 등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많은 유명인이 방문했던 곳으로도 유명해서 알프레드 히치콕, 프란츠 카프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등 세계적인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곳 문턱을 드나들었다. 나는 카페 첸트랄 커피, 아내는 카페 베르커트, 아이는 첸트랄에서 파는 사과 에이드를 시켰다. 다른 카페와 다르게 간단한 식사도 팔아서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팎으로 멋진 분위기


카페에서 나와서 또 다른 성당을 보러 갔다. 아이는 질릴 법도 했는데 이제는 체념했는지 싫은 내색 안 하고 잘 따라줘서 고마웠다. 우리가 간 아일랜드 베네딕트 수도사의 성당(Schottenkirche)은 12세기에 아일랜드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세웠으며, 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성당의 내부에는 14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15세기의 제단화, 그리고 16세기의 오르간 등이 있다. 내부 분위기가 전에 갔던 프라하의 스트라호프 수도원 내부와 닮아서 어떤 건축 양식이 있는지 궁금했다.


구름에 떠있는 듯한 성당 내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베토벤 기념관(Wien Museum Beethoven Pasqualatihaus)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을 기념하기 위해 1872년 건립되었다. 음악의 도시답게 이런 집들이 곳곳에 있었다. 이곳은 베토벤이 1804년부터 1808년까지 거주했던 집을 개조하여 만들으며, 베토벤은 이곳에서 교향곡 3번 '영웅'과 5번 '운명'을 작곡했다. 베토벤의 악보, 편지, 초상화,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야 할 명소였다.


모차르트에 이어서 베토벤이 살았던 곳까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독일의 클래식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독일 본에서 태어났지만 활동은 빈에서 주로 해서 이곳이 그의 주무대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성인이라는 뜻에서 악성(樂聖) 베토벤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 요한에게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가 꽤나 엄격했는지 어렸을 때 배우면서 자주 울었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유명한 일화는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을 만난 것인데 하이든의 바쁜 일정 탓인지 스승과 제자라고 말하기엔 베토벤 자신이 생각할 때 그리 배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청력을 잃게 된 사건인데 점진적으로 듣는 것이 약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 이 시대 음악가들은 녹음 기술이 없고, 보청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작곡하고 수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베토벤은 그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나간 헬델 광장(Heldenplatz)은 인네레슈타트 지구의 호프부르크 왕궁 앞에 위치해 있는 광장으로 1888년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광장의 중앙에는 오스만 튀르크를 물리친 프랑스 출신 장군인 오이겐 공의 기마상이 있었다.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으로는 1938년 3월 15일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침 광장에서 오스트리아 군악대 행진이 있어서 좋은 구경을 했다.


군악대를 배경 삼아서


광장을 끼고 있는 호프부르크 왕궁(Hofburg)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궁전으로 오스트리아 공국 시절부터 해서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치며 오랜 기간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대통령 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선대 군주가 사용한 방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특이한 가문의 특징 때문에 방이 굉장히 많은 궁전으로 유명했다. 여러 왕실 보물들에서 인상 깊은 것은 나폴레옹 2세가 사용했다는 침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나폴레옹과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의 딸로 왕후가 된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나폴레옹 2세는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에서 21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왕실 마구간은 현재 승마 학교로 사용되고 있으며, 왕실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뒤편에 있는 왕궁정원(Burggarten)은 1809년 나폴레옹의 침략 이후 1819년 프란츠 2세가 만든 개인 정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화국이 되면서 민중들에게 개방되었다. 1948년에 세워진 헤라클레스 분수 뒤로 황실 나비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고, 1781년에 세워져 빈에서 가장 오래된 프란츠 슈테판 황제의 기마상, 1957년에 세운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동상 등이 있다. 가장 유한 것은 모차르트 동상으로 높은 음자리표 모양이 아름다운 화단과 함께 이곳이 왕궁정원인 것을 알리고 있다. 겨울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이곳에서 사진을 남기며 모차르트를 기억했다.


음악 신동의 기를 받아서


노을이 지고, 밤이 다가오는 빈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특히 오페라극장 앞 도로 주변이 압권이어서 걷기만 해도 좋았다. 우리는 숙소로 계속 걸어가서 거의 도착할 때쯤 보인 마트에 들어가 빵, 마늘, 과일, 달걀, 냉동 새우, 파스타, 맥주, 샴페인, 와인, 소고기 등심과 안심, 돼지고기 안심, 아이스티, 아이란, 샐러드 채소 등을 양팔이 무거울 정도로 샀다. 거의 20만 원어치 장을 봤는데, 체코보다는 비싸지만 우리나라보다는 싼 것 같았다. 숙소에 와서는 메뉴 추천을 받아서 갈릭 쉬림프, 소고기 등심과 안심 스테이크, 돼지고기 안심 구이, 샐러드와 샴페인으로 만찬을 즐겼다. 좋은 날씨 속에서 좋은 경험을 한 빈에서의 하루였다.


감성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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