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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Jan 22. 2024

07. I am English man

In New-York (사실 뉴욕은 아니지만!)

 여기 도착한 지도 어느덧 다섯 달이 다 되어 간다. 사실 이 꼭지는 좀 더 빨리 써볼걸 조금의 후회가 함께 들기도 하는 게, 이제 이 곳에서 내가 이방인이라는 감각이 처음의 시기들보다는 조금 무뎌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방인보다는 이 곳의 생활인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현지적응 기간에 출퇴근할 때는 노예무역선을 방불케 하는 인구 밀도의 버스에서 Sting 의 English man In New-York을 들었다. 사실 그 때 들을 때는 코웃음이 절로 났다. 영국인이 미국 가서 내가 이방인입니다 라는 노래를 하다니! 결국 자기 나라 사람들이 가서 세운 나라니 언어장벽도 없고 식문화나 취향에 있어도 선택지가 없지 않을 텐데 참으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가사라고 생각하였다. (여담이지만 여기 와서 다른 대륙에서의 향수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나쁜 습관이 생겼다. 모든 것이 없고, 노력을 해도 이렇다할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대륙에 있다 보니 다른 대륙들은 자꾸 양반인 것처럼 보이는, 몹쓸 고질병에 걸리고 말았으며 아직까진 별다른 차도가 없는 슬픈 상황이다.)     


 가사가 웃기긴 하지만, 여전히 그 인트로의 뚱땅뚱땅 선율을 대신할 만큼의 ‘이방인스러운’ 노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에 왔을 때 무척 즐겨들었다. 아시아인 자체가 별로 없어서 어디 가든 겸연쩍을 정도의 시선을 받는 것도, 돈 많은 외국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현지 사람들의 수없는 플러팅을 받는 것도 (실제로 이렇게 신분 상승 (?) 한 케이스가 생각보다 있어 놀랐다.) 중국마트에서조차 아시아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 것도, 듣던 것과 달리 익숙했던 식재료들을 현지에서 전혀 구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로 듣던 것과 달리 사람 미치게 하는 날씨도, 낯설었다. 낯설었지만 놀러온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오래 끓여왔던 꿈이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편안하진 않겠지만, 괜찮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요즘엔 참 버석버석해졌다. 대신 내 믿음의 나침반은 ‘괜찮을 거란 내 생각들이 오만이었다’ 는 새로운 결론으로 바쁘게 바늘을 돌리고 있는 중이다.     




 내 음식의 1인분이 자주 양 조절에 실패하는 이유는 감자도 1인분 양파도 1인분 버섯도 1인분씩 넣다보니 결국 3인분이 되어서였다. 이 곳에서의 불행도 비슷했다. 날씨도 한 부분, 외국인이라 견뎌야하는 관심의 강도도 한 부분, 교통도 한 부분 식재료 접근성도 한 부분... 아마 이 중 몇만 감당해도 되었다면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저 모든 걸 한 번에 견뎌야한다는 점이었다. 실내에선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 집에 들어온 탓에 실외건조를 해야 하는데 빨래를 하는 날마다 비가 왔다. 피곤해죽겠는 날에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이유로 말을 걸어왔다. 이 곳의 주요 교통수단인 모토를 타다 걸리면 파면이라, 집에서는 꽤 먼 버스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기다린 버스는 이미 만원이라 지나치기 부지기수였다. 이 동네는 조용한 주거단지일 줄 알고 계약했는데, 옆 골목의 미니바들은 매일 새벽까지 풍악을 울려 잠을 설치기 일쑤다. 동네에 술집은 있지만 다른 상점들은 없어서 장을 보려면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한다. 어렵게 간 마트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없을 확률이 낮지 않다. 먼 곳에 있는 중국마트까지 어렵게 물건을 사러 갔는데 재고가 없고 두세 달 뒤에나 들어온다고 한다. 옆 나라로, 다른 대륙으로 간 동기들과 어려움을 나눌 때마다 이 곳이 가장 제약이 많은 곳임을 매번 확인하게 되었다. 내가 이곳을 미워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놀러온 게 아니라, 할 일과 생각을 미리 준비하고 왔음에도 그랬다. 스스로가 생활의 단단한 기반 위에서 에너지를 휘두르는 초라한 사람일 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긴 기간 스스로와의 관계를 잘 쌓아왔기 때문에 내 자신이 삽시간에 미워지진 않았다. 다만 요즘의 나는 스스로와 생산적인 대화를 그렇게 많이 하지 못 했어서, 여기가 미운 만큼 내가 나를 미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다행히 휴가 계획을 세우면서 이 곳을 원망하는 마음은 잦아들었다. 사실 휴가를 가는 나라에서도 나는 똑같은 이방인이다. 다만 이제 비중이 좀 높은 이방인 중 하나일 것이다. 가서는 여기만큼 물자에 쫓기지 않고 원하는 것들을 들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여기서의 남은 생활에 큰 비빌 언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되게 별것 아닌 것 같았던 것들에 끝내 위안을 받고 마음이 놓이는 스스로의 빈궁함이 또 못내 처량하고 속상했다. 아니라고 여겨왔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좀 더 형편없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 방법은, 형편없는 스스로를 어찌저찌 받아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기보다는 내 식으로 노력하고 성장해서 (종국엔) 잘하는 사람이 되어서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성과주의를 지양하자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마음 어딘가에는 기준으로 남아있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요즘엔 자주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이게 어딘가의 이방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하는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차후 이 원고는 이방인의 마음이 결국 어디로 수렴되었는지를 포함한 내용으로 수정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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