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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Jan 03. 2024

02. 현실과 이상 사이

(aka. 친구와 고객 사이 그리고 수원국과 공여국 사이)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좋아하는 노래 가사의 한 꼭지다. 잘 안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이 곳에 도착하고 네 달 남짓이 되어서야 조금은 알겠다는 기분이 겨우 든다. 어떤 날은 얕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냥 인상을 쓰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봉사하러 왔는데 이 푼돈 (?)을 깎아 무엇하겠는가 싶어 하루 종일 웃는 낯으로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생각하는 중심에 가까워졌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다름 아닌 주제 파악 (어려운 말로 메타인지) 이었다. 이 곳에서 내가 어디쯤 있는 지를 짚어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비자가 있는 장기 거주자이고, 한국인이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현지인이다. 돈을 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도움을 받고 자주 웃음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따금은 이런 스스로의 속성들이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니라는 걸 자주 느끼면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처음 이 곳에 도착할 때를 떠올려보면 모든 게 참 어려울 게 없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자주 헤맬지언정, 뭔가를 정리해둘 때는 헤맬 구석을 남겨두지 않는 게 오랜 나의 습성이었다. 선명한 표현들을 좋아해왔다. 오랜 꿈이었고 선명함을 기반으로 차곡차곡 잘 정리해온 마음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될지언정 보람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곳에 떨어진 지 2주 차부터 집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살게 될 동네에서 혼자 집을 알아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어서, 페이스북을 통해 브로커들에게 컨택했다. 그들에게 나는, 3달치 월세를 한 번에 내며, 수수료도 훨씬 많이 받아낼 수 있는 돈 많은 외국인 고객이었다. 브로커를 고르는 과정은 무척 지치는 여정이었고 5명쯤 컨택 했을 때쯤엔 질려서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신뢰했고 결국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게 한 브로커는 Sam 이라는 고학생 브로커였다. 학비를 벌기 위해 부업으로 브로커 일을 한다고 했다. 그는 시험기간에도 내 일정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으며, 택시를 타고 다닐 때도 현지어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대신해 번거로운 가격협상을 해주었다. 1,200달러의 월세를 700달러까지 깎아다 내밀기도 했으며, 주말까지 원하는 집을 찾아주려고 불철주야 노력했다. 다른 브로커들과 달리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늘 먼저 연락해주어서 브로커 컨택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게 그의 일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는 현지어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첫 현지인 친구였고, 나에게 추근대지 않은 몇 안되는 현지인 남자였다. 자주 함께 다니며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의 학업에 외국인 친구로서 좀 더 보탬이 되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그에게 지불할 수수료는 한 달 월세의 10% 인 65$ 정도였으나, 잔돈을 받기도 애매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100$ 정도면 그에게도 나에게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계약서를 쓰기 전날, 그는 나에게 첫 지불 월세의 10%인 185$를 요구했다. 나는 세 달치 월세를 한 번에 내니 그렇게 쳐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현지 직원들이 한 달 월세의 10% 도 많다고 조언해주어 이미 과한 돈을 지불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브로커를 널리널리 홍보해주었는데! 사정을 설명하고 100$를 치우듯이 주었다. 꽤 오랜 기간을 가족보다도 더 자주 연락했는데 결국 일이 그렇게 되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실 한국이었다면 이렇게 마냥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현지인에게 속임을 하도 당해 마음을 닫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으나, 나 역시 그러고 싶진 않아서 터놓고 지냈는데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현지인들에 환멸 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 되었다. (물론 그러고 싶다는 건 여전히 아니다.)


 이후에도 그는 그의 학업 과제들을 보내오며 학비지원 차 돈을 줄 수 있는 지 물어왔다. 그가 과제 내용들을 굳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던 건, 그의 학업이 내 마음을 가장 약하게 한다는 걸 그 친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호의는 언제든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끼면서, 이제는 그저 브로커이기만 한 그를 차단했다.


 수수료 일이 있기 전까지 그는 내게 뭘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전공과 미래부터 여기서 내가 하게 될 활동까지 아우르는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가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려고 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에게 재정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와 나눈 이야기들은 참 재미있었다. 나는 공여국의 사람이라 이게 마음 아픈 상황이라는 걸 느낄 수 있지만, 수원국의 사람인 그에게는 돈이 급하기 때문에 슬플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의 단차가 실감났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슬픔도 사치 같았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앞으로도 이 룰은 꽤 굳건할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한국이었다면 애초에 나쁜 놈이었을 거라고 단정했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서 내게 남아있는 인류애를 역설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사회에나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지내기 마련이다. 좋은 현지인도 있고 나쁜 현지인도 있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Sam 이후에도 현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벽을 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길거리 음식이랍시며 꽈배기를 튀겨 선물하고, 유독 나에게만 배고프다고 하는 가드에게 감자와 계란을 삶아준다. 집 매니저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주었고, 내 빵을 살 때 코워커의 아이들이 좋아했다는 빵을 기억해뒀다가 종종 들고 가는 외국인 친구다. 이들에게 돈을 주지는 않지만 종종 선물하고 자주 시간을 함께 보낸다. Sam 덕분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는 공여국의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며 조심하게 되었다. 돈을 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알기에, 돌아갈 때쯤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돈을 주진 않을 것 같다. 이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돈이라는 게 보일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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