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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Jan 10. 2024

04.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feat. 재외국민은 한인교회를 찾아)

고백하자면, 나는 교회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모친은 5 자매를 모두 모태신앙으로 낳으셨고, 5 자매 중 4명을 제법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키워내는 기염을 토하셨다. 유년부 시절은 성경암송대회에서 1등을 못 먹으면 대신 눈칫밥을 먹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면 한글을 떼면서부터 시작해서 학생 때까지만 어림잡아 80번은 성경을 완독한 참신앙 가정 자녀였으니 그 기대가 근거가 없었던 것 같진 않다. 결과적으론 수상을 곧잘 한 덕에 눈칫밥을 먹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동생들과 줄줄이 단상에 오르는 게 가족의 자랑이던 시절도 있었고, 한때지만 찬양인도도 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는 엄마의 닦달에 휴학까지 하고 성경공부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독실한 크리스천 홍 여사, 그녀의 장녀는 꿋꿋하게 성서의 유일신을 회의하는 글러먹은 방향의 유신론자로 자라고 말았다. 홍 여사의 되바라진 딸은 하필 또 전공에서 기록학을 배워와선, 성서는 고대 기록학에 근거하면 신뢰할 만한 기록이 아니며 짜깁기된 책일 뿐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일삼았다. 안타깝게도 홍 여사는 애저녁에 이미 폐지된 호주제를 거론하며 딸과 호적을 파네 마네를 논해야 했다. 모녀의 종교 갈등은 딸의 안정적인 직장 취업과 함께, 더 이상 딸을 교회로 떠밀 방법이 없게 되자 그 유구한 역사의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한 봉사기획 대외활동에서 팀장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팀의 주요 업무는 봉사가 필요한 수요처를 발굴해서 봉사자들이 오는 플랫폼에 포장해 내놓는 일이었다. 남들이 아무도 모르는 쪽방촌 가장 구석진 곳에 월동 대비 연탄을 놓고 싶은데 그 동네가 초면이라면? 그 동네 작은 교회 사모님이 알려주시는 정보가 가장 정확할 때가 있다. 세상의 시선에서는 패배자이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조차 성서의 교리와 함께라면 하늘 아래 같은 형제자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동체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회적 유대감이나 실질적 도움을 제공한다. 예상보다 많은 노인복지관과 사회시설들이 교회의 자본에 의탁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피봉사 기관 관계자들과 자주 연락하고 현장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 복지는 매우 큰 부분들을 종교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간들을 지나며 종교에 대한 편견이 상당 부분 녹아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싫은 게 참 많기도 하고, 뭘 정말 싫어하며 사는 것보다 별생각 없이 사는 게 훨씬 마음의 소모가 덜하다고 믿기 때문에 참 잘 된 일이었다.     


 또 몇 년이 지나, 또 봉사하겠다고 아프리카 한가운데 떨어진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교회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역시 한인교회에 발들인 이유는 첫 번째가 밥이요, 두 번째는 모국어에 대한 열망이었다. 타향 생활을 하게 되면, 특히 물류가 지구상 가장 구리고 그 흔한 중국마트도 잘 없는 아프리카에선 한식 재료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게 재료를 어렵게 사 오고 같은 요리법을 써도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맛이 나기 일쑤다. 밥 하기도 어려운데, 그냥 가도 진짜 한국 같은 밥을 준다니 참으로 은혜로운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교회의 자매님들과 곧 귀국하시는 선생님들께서는 그리운 고국의 식재료와 생필품을 아낌없이 남기고 가셔서 그 은혜에 하해와 같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언어에 대한 것도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이곳의 공용어는 영어, 불어, 키냐르완다어, 스와힐리어 4개 국어다. 4개 국어를 모두 쓰는 것은 아니고, 현지인들은 거의 르완다어를 사용하고 공적인 소통에서는 영어를 쓴다. 다만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들의 비중은 높지 않다. 영어가 공용어가 된 지 20년이 안 되었기 때문에 현지인 간 세대 차이가 나는 것도 외국인이 겪는 총체적 난국에 일조한다. 배운 계층의 나이 든 사람은 영어보다 불어를 편안해한다. 나는 평소 한국어에서도 제법 어려운 단어들을 언어유희랍시고 즐겨 쓰는 편이고, 그 결과 영어가 매우 늘지 않아 모국어에 대한 갈증이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영어를 못하고 상대도 영어를 못하는 상황에서 온종일 영어로 대화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어서, 그냥 쾌속으로 질주하는 한국어 회화가 하고 싶었다. (나는 원래도 말이 매우 많고 빠르다.) 교회에서의 적응 역시 어렵지 않았다. 찬양도 상당수 아는 찬양이었고, 성경 읽기도 익숙했으며, 사람들은 친절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나저러나 해도 가장 큰 부분은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해외에서 다들 자기의 힘듦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그런 건진 알 수 없지만, (개독교로 대변되는) 한국 교회 특유의 무례함과 무질서함 혹은 무작정에 가까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없어서 마음이 참 편안했다. 대체로 차분하고 신실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상냥하고 예의 바르다.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고, 우리나라의 기복신앙처럼 뭘 자꾸 구하지 않는다. 종교에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면, 여기서는 종교의 순기능을 더 자주 보았다. 여러모로 열악한 아프리카 생활에서, 자기의 힘듦을 해소하는 온건한 수단으로 느껴졌다. 물론 밥도 맛있다. 흔히 보는 종교적 공동체가 이 정도만 되었어도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는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와보니 엄마가 종교에 있어 나를 그냥 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독교 교리 상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련의 만약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일들을 거쳐, 이제는 종교를 그렇게 싫어하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일들을 혼자 하는 걸 더 편안하게 생각하고, 스스로가 이렇게 한인교회에 자주 드나들 거라고도 역시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여기 와서 사람이 사람에게 생각보다 도움이 되고, 나 역시 타인을 기꺼이 도울 줄 알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 사회적 연대가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 생각보다 크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한 유명한 찬양에 나오는 것처럼,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타향생활에선 밥을 찾아 또 말을 찾아 한인교회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끝내 내게 신앙이 생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은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것 같다. 결국 기독교인의 참소양인 순종에 끝내 동의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내가 어드매의 도구로 쓰이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그분의 뜻대로만 행하며 나의 선택지는 없는 삶을 사느니 그냥 지옥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렇게 신실한 신앙인들을 굳이 시험에 들게 하는 심술궂은 신을 이해하는 건 매우 어렵다. 여전히 내 자아는 어딘가 의탁되기가 싫은 것 같다. 많은 경우 남손에 일을 맡기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편하고 빠르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수록 자기를 힘들게 하는 버릇이라는 걸 알지만, 아직도 그렇다는 점에 오늘에도 반성을 덕지덕지 덧붙여본다. 종교인들이 절대자를 믿어서 누리는 그 평화가 이따금은 몹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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