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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Jan 19. 2024

05. 인류애 저금통

 웹툰 <유미의 세포들>을 좋아한다. 작 중 주인공 유미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켜지고, 불안하거나 슬플 때는 꺼지는 마음의 별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별이 있었다면, 내 마음에는 인류애 저금통이 있다.


 내 인류애 저금통에선 이런 때 소리가 난다. 나의 친절이 타인에게 유익하거나 그들을 기쁘게 했을 때. 반드시 선의에서 출발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첫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을 때. 사람이 모르는 타인을 도우며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증명했을 때. 회의와 비관은 내 오랜 습관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이 선하다고 믿고 싶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인류애가 쌓일 일이 많지 않았다. 바야흐로 대혐오의 시대다. 미움은 싱싱하고 사랑은 시들한 지 오래다. 냉정은 어른의 기본적인 애티튜드이자 시대가 찬미하는 미덕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쉬운 미움보다 어려운 사랑을 따르고 싶었다. 인류애를 원한다면 원하는 이가 찾아 나서야 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의 인류애 적립은 대부분 내 의도였고 계획이었다. 인류애가 쌓일 장에 갈 기회를 자주 만드려고 노력했다. 나는 7할에 가까운 P였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적어도 인류애는 타이밍에 기대기보다는 계획과 노력에 기반해 얻어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여기서는 좀 달랐다. 우연히 쌓인 잔고가 꽤 쏠쏠하다. 애초에 봉사자 신분으로 온 것도 있고, (내 애가 아니라면) 언제부턴가는 아이를 예뻐하는 습성도 한몫했다. 이곳엔 어린이들이 참 많다. 그 애들은 참 사랑도 많다. 처음 만난 외국인을 덥석덥석 잘도 안고 하이파이브도 해달라고 한다. 그 친구들의 눈에 한껏 차오른 천진함은 볼 때마다 인류애가 차오른다. 아시안이라 눈에 띄고 바가지를 한껏 쓰기도 하지만, 아기들의 슈퍼스타가 되는 게 무척 좋아서 이목을 끄는 것도 (아직까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옮는 것이라고 전에도 지금도 굳게 믿는다. 물론 이따금 돈이나 음식을 요구하는 어린이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그저 사랑둥이다. 그 사랑을 많이 받았다. 여기서 싫음에 절여지지 않는 건 한국에서보다 훨씬 쉬웠다.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닌 경우가 적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받은 친절함도 적지 않다. 우리 집 매니저는 집 밖에 안 나가면 왜 집을 안 나오는지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내주며, 출근한 새 비가 오면 오만 곳에 널어둔 빨래를 호로록 걷어다 세탁실에 둬준다. 가드는 아침에 출근할 때 인사를 하지 않으면 허전해하고, 나의 오만 헛소리에도 세상 자지러지게 웃어준다. 그들의 친절함은 내게 국한되지 않는다. 출근하는 학교 교사들은 그토록 어려운 형편에도 동료의 이직을 무척 비싼 케이크로 축하하였다. 이전의 교장은 고학생인 내 코워커를 위해 남몰래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코워커의 남편은 사회적으로 유기된 장애인들의 인권을 위해 빈곤한 와중에도 노래 캠페인을 꾸준히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이곳의 사람들이 더 고된 삶을 산다. 그러나 타인을 도우며 사회적 공동체의 기능을 유지하며 사는 쪽은 여기인 것 같다. 쉽게 남을 돕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인류애의 보급은 이전에 비해 어렵지 않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미리 적어두자면, 나는 정이나 공동체 예찬론자가 아니다. 개인의 영역은 존중되어야 한다. 개인과 개인이 맞지 않으면 거리를 두면 그만이다. 다만 공동체와 개인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으로서 있으면서 여력이 되는 한 타인을 돌볼 수 있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그 두 개념이 반대의 사분면에서 자주 대립했던 것 같다. 연대나 동료시민이라는 좋은 단어들이 조금은 다른 뉘앙스들을 머금고 꺾이는 것을 자주 보았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인류애는 쌓일 때는 동전이고 타들어갈 때는 지폐다. 모을 때는 금액이 쉽게 높아지지 않는데, 그렇게 어렵게 쌓여놓고선 참 쉽게 홀라당 타버린다. 쌓일 때의 뿌듯함은 반짝 사라지지만, 타오르고 난 후의 쓰라림은 오래간다. 그럼에도 끝내 저금통의 배를 갈라서 내다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유지하는 건, 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양의 영역이라면 결국 나를 혹은 또 누군가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덕을 좀 봤다. 요즘엔 스스로의 틀림을 자주 봐서 마음의 자주 흔들린다. 과거의 내가 또 뭘 잘못한 것 같았는데, 태권도장에서 몸 좀 쓰고 (명심하자 뇌도 몸이고 인간도 동물이다! 정신이 복잡할 땐 몸을 먼저 쓰는 것이 좋다.) 친절하고 서로 돕는 같은 반 메이트들을 보니 금방 환기가 되었다. 어렵사리 아무도 잘못한 게 없고, 설사 뭔가 잘못들이 있더라도 나도 비슷했을 것이며 우리는 그저 서로를 견딜 수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의 무탈한 일상을 빌어줄 수 있었다. 나의 인류애는 이기적이기도 한데, 그들의 안녕을 비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 결국 이쪽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살 거라면 이기적일지언정 인류애를 지키고자 아등바등하는 쪽이 냉정을 빙자한 무관심 쪽보단 훨씬 어른스럽다고 믿는다.     


 집에 와선 좋아하는 가수의 신보 티저를 보았다. 함께 적힌 문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리 제일 근사하게 저물자.’ 인류사에 대단한 족적을 남길 순 없겠지만, 언젠가 어차피 죽는다면 한 인간으로서는 근사하게 저물고 싶다.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개인이라면 사람의 생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은 것 같다. (평생 성취를 쫓고 싶진 않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크고!) 언젠가 세상을 떠날 때가 혹은 빛나는 성취의 시기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필연적으로 올 테니. 잔고는 모를 일이지만 인류애 저금통 혹은 통장의 기록들이 부디 그 근사한 저묾에 조금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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