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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유인 Nov 09. 2020

문학사가 될(?) 대중문화 한 문장

3호 '시간을 달려서'

우리에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우리에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시간이 공평한 듯 공평하지 않은 까닭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지구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이다. 지구를 벗어나면 시간은 얼마든지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에 의해서 왜곡되고 뒤틀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시간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두 가지로 구분된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인 '크로노스'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 시간인 '카이로스'. '크로노스'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가 가이아의 아들인 크로노스이든 다른 존재인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이든 결국 시간이라는 속박을 만들어낸다는 바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끊임없이 농경의 시간, 아무리 인간이 술수를 부린다고 해도 벼를 심고, 익어가도록 하는 데에는 평등하게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같다. 유전자를 변형시키지 않는 한,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벼가 익어가는 데에는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두 벼에도 차이는 있다. 좋은 토양에서 좋은 비료와 좋은 햇살을 받고 자란 벼와, 땅에 그냥 심겨서 온갖 풍파를 이긴 벼는 질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같은 시간을 들이더라도 어떻게 시간을 사용했는가에 따라서 시간의 결과물은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은 폭력적이거나 폭력 그 자체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없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간은 흘러가고, 인간은 시간이라는 거인 앞에서 나약하다. 그러나, 인간이 시간에 전현 반항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인간을 사건이라는 사태에서 탈락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시간이 흐를 동안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인간은 시간의 폭력 앞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서 인간은 쓰고, 또 쓴다. 기록하고 베끼고 연구를 하고 배움을 이어간다. 우리가 즐기는 수많은 것은 사실 시간의 폭력에 맞서 온 인간의 발악이다. '난중일기'를 읽거나, '정사 삼국지'를 읽으며 인간은 흘러간 시간을 읽고 복기한다. 복기하면 할수록 시간의 폭력은 무의미해진다. 시간이 없애고자 했던 수많은 사태들이 다시 독자 앞에서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평선 너머 사라진 시간이 다시 현재의 시간과 접속하면서 인간은 크로노스의 거대한 낫에 반항한다. 그대의 낫으로도 이 기록은 끊을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인간에게 크로노스는 '기회를 잡는 순간'인 '카이로스'가 된다. 얼마 전부터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제목도 '카이로스'인데, 끔찍한 시간의 폭력에 맞서는 나약한 인간이 '기회'를 잡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플롯에서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시간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은 절대로 거대하지 않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냥 오래된 옛 기록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사랑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심지어는 과거를 추억하는 것마저 시간에 저항하는 행위이다. 시간의 폭력에 맞서는 방법은 그저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족하다. 시간의 폭력이 만드는 것의 틈새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고백이나, "그때의 우리는 지금보다 더 열정적이었는데"라는 후회나 타임캡슐을 심는 것까지도, 시간은 맥없이 나약한 인간에게 무너진다.


시간의 폭력이 낳는 가장 잔혹한 폭력은 바로 잊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강렬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간다. 마치 이미 다 타버린 장작처럼 시간은 사람들의 감정을 재로 산화시킨다. 학교를 졸업하면 우린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그 말에 담긴 함의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얘기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그 이전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토록 절친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연락이 끊기고, 이렇게 절절했던 사랑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변모한다. 그래서 시간은 폭력적이다. 쉽게 연락하던 사이도 시간이 지나면 어색해진다. 그래서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에게는 언제나 용기가 따른다. 물론 바로 그 용기 속에서 역시 시간은 처절하게 패배한다.


'졸업'은 수많은 시간이 교차라는 곳이다. 졸업을 통해서 수많은 이들은 이전의 시간을 내려놓고, 다음 세계로 나아간다. 그래서 '교실'이라는 공간에는 영원히 흐르지 않는 시간이 있다. 교실의 시간은 크로노스에 얽매이지 않는다. 교실은 모든 이들에게 카이로스로 존재한다. 그래서 누구나 교실로 돌아오면 그 시절이 복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의 폭력에 대항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주인공도 바로 그러한 시간에 저항하는 어떤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만나지 못해 맴돌고 있어

우린 마치 평행선처럼

말도 안 돼 우린 반드시 만날 거야

기다릴게 언제까지나


평행선이 잔인한 이유는 끊임없이 나아가도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수학에서는 '평행선 공준'이라고 한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성립시키는 근간이 된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이 명제는 부정해도 전혀 모순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공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탄생했다. 이는 평행선의 고유한 성질을 깨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행선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평생선 위를 달리는 화자의 방향이 2가지만 있기 때문이다. 앞을 보거나 뒤만 보거나 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고정된 설정값이 평행선의 교차를 방해한다. 그래서 평행선의 저주를 끊어내는 방법은 간단한다. 서로 앞과 뒤만 보던 두 화자가 방향을 90도만 틀어서 다른 방향을 보면 된다. 그러면 평행선은 결국 깨지고, 화자는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그래서 두 화자는 평행선 위에 있지만 결코 그러한 전제에 지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다가서려 해 봐도 엇갈리고 있어

좋아한단 말도 아직 못 하고 있어

머뭇거리는 널 보고 있으면

우린 아직도 많이 어리긴 한가 봐


결국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을 가로막는 것은 시간이다. 아직 우리의 고백이 발화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백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고백을 통해 두 사람이 만나는 사태 자체가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으로 가야하는 시간에 타인이 끼어드는 기적이 바로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 아직 서로에 대한 마음과 시선이 무르익지 않아서 화자는 고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이 마음을 고백한 기회조차 없어진다. 그래서 화자는 그렇게도 조급해진다.


시간 속에 갇혀 길을 헤매

그렇지만 우린 결국 만날 거야

진심인 것만 알아 줘 정말

서툴기만 한대도


그래서 결국 화자는 엄청난 용기를 내고자 한다. 이 시간이 지나도 나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이 시간이 흘러도 나는 당신에게 고백할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화자는 시간 속을 헤매기로 결정한다. 시간에 맞서 고백하는 것보다 시간의 폭력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당신에 대한 진심과 존재를 기억하는 것은 더욱 거대한 저항을 필요로 한다. 아직 당신과의 시간이 서로 섞이기에는 우리 사이에는 이야기가 부족하다. 나는 당신의 시간에 접속하기 위해서 우리 사이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시간에 저항할 것이라는 화자의 진심이 서툴기만 해도 가히 절절하다.


이거 하나만 약속해 변치 않기를 바랄게

그때도 지금처럼 날 향해 웃어 줘

시간이 흘러서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엇갈림 그 속에서 손을 잡아 줄게


화자가 견디기로 한 시간 속에서 이미 고백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이렇게 만나자, 시간이 흘러도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이 견딜 수 있도록 당신을 지금과 같이 웃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서 우리가 비로소 서로의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평행선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사이를 뚫고서, 나는 당신의 손을 잡기 위해 평행선을 벗어날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마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노래는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화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별을 준비한다. 누군가는 플랫폼에서, 누군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는 다리 위에서, 누군가는 교실과 연습실에서, 저마다 교복을 입고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서려있다. 무언가 다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이, 아직도 이 시간이 오면 안 된다는 듯이 안타까움이 있다.


미처 말하지 못했어 다만 너를 좋아했어

어린 날의 꿈처럼 마치 기적처럼


사실 화자 자신도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향한 마음이 정말로 무엇인지, 지금 이 마음을 고백해도 되는지 수백 번, 수 천 번 고민하다가 결국은 다이어리에 적힌 글씨들과, 나의 이름표, 한 아름의 꽃다발과 편지, 외로운 곰인형, 여행가방과 쪽지 한 장, 그렇게 하얗게 눈이 내리면 나는 당신과의 시간을 곱씹어보다가 마침내 깨닫는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좋아했구나, 그렇게도 단순했던 진심이 문장으로 발설되면서 마침내 뛰어간다.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거친 세상 속에서 손을 잡아 줄게


시간이 흘러야만,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어른'이라는 것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의 시간을 오롯이 살아간다는 것은 카이로스적인 시간이다. 물론 민법으로 어른이 되는 시간은 19세가 되는 때로 정해져 있지만, 크로노스적인 시간은 어른으로 살기로 결심한 카이로스적인 개인의 시간 앞에서 무너진다. 마침내 너에 대한 마음을 진짜로 알게 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된다. 비록 크로노스의 낫은 아직 나에게 어른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카이로스의 방패를 들고 당신의 손을 잡고, 비로소 우리의 시간은 하나가 된다. 그렇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겪으며 한 명의 인간은 어른이 된다.


시간에 맞서는 서사는 어찌 보면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애초에 크로노스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퇴출당하는 순간부터 인류에게 시간에 맞서는 서사는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식들의 시간을 삼켜버린 비정한 아버지, 그리고 그것을 다시 토하게 함으로써 멈춰진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이건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이고, 나약한 인간이 시간에 맞서는 방식은 단순하고 처절하다. 이 서사는 그래서 가치가 있다. 나약하고 특별한 것 없는 소녀들이 시간에 맞서는 가장 단순하고 어려운 방법을 보여주기에 이 서사는 정전의 가치가 있다. 당신에 대한 지극한 진심과 숙고, 그리고 드디어 깨닫게 된 마음이 두 개의 시간을 잇기 위해 달려간다. 인간은 시간에 비해 나약하고 부질없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하고 연락을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다보면 결국 인간은 시간에 저항하면서 시간을 달려간다. 그렇게 맞잡은 두 손 사이에서 시간은 멈추고 되감긴다.


시간을 달려서 이렇게 어른이 되었고,

엇갈린 그 속에서 너를 안아 주었고,

거친 세상 속에서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젠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너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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