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30
민효에게서 입술을 뗀 후 자리에서 일어선 강윤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던 강인과 또 다른 민효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느 쪽이 민효야?”
그러자 소파에 누워 있던 다 나이디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을 보고 있는 쪽이에요.”
다 나이디는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이름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강인이 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아까까지는 지금 이 쪽 민효의 손바닥에 그 이름이 있었지.”
“그녀가 허락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도 좋다고.”
다 나이디는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여기에 머무르도록 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당신의 사랑. 따뜻한 슬픔. 변하지 않는 마음. 굴하지 않는 신념........”
“말도 안 돼.”
강윤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분명 민효라고 생각하고 키스했던 사람이 사실은 다 나이디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강인의 곁에 선 민효는 차분한 표정으로 또 다른 자신을 응시했다. 강윤이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 즉 강인과 차분한 민효에게 질문했다.
“놀랍지 않아?”
“놀랍지 않아. 처음에는 좀 놀랐지만......내가 모르는 일이 많이도 벌어졌나 보다고 생각했지.”
다음 순간, 소파에 일어나 앉아 강윤을 올려다보던 민효, 아니 다 나이디의 눈에서 홍채 탈색이 일어났다. 곧이어 실핏줄만큼이나 가느다란 빨간 눈물이 눈을 타고 잽싸게 떨어졌다. 말 그대로 눈물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만큼 빠른 동작으로 그 피눈물은 다 나이디의 뺨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만큼은 강인과 민효도 놀라운 마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일어난 변화를 직시했다. 특히 민효는 극도의 혼란감으로 인해 얼어붙은 모습이 자못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사실은 금세라도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의 의식이 어떻게 해서 강인의 곁에 선 이 몸뚱아리, 이 또다른 자신에게 옮겨 왔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그녀이고 그녀가 나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민효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목소리를 매우 혐오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싫다. 이런 목소리도 싫다. 저 여자가 빌렸다는 내 육체와 음성이 내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 나이디는 뺨을 차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으나 눈물 자국은 선명하게 그녀의 뺨에 긴 흉터를 남겨 놓았다. 그녀는 전에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것도 민효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안 있어 주사위 담당자가 나를 데리러 올 겁니다. 나는 이 사람(강윤)이 좋아서, 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민효)의 모습을 잠시 빌렸어요. 다행히 내가 빌린 육체와 영혼의 소유자는 곱고 순수한 마음씨의 소유자라 내가 자신을 잠시 점령하는 것을 너그러이 묵인해 주었어요. 그러나 어차피 오래 있지는 못할 예정이였죠.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따라 옮겨다녀야 할 운명이고 우연치 않게 정해진 경로에서 이탈해 이 곳으로 온 거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강윤은 오래 전 자신이 발견했던, 죽어가던 주사위 담당자를 떠올렸다. 그가 자신에게 주사위를 준 것은 예정에 없었던 돌발행위였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들은 너무 긴밀하고, 복잡미묘하고, 슬프기까지 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얽혀 있어요. 나까지 끼어들었다가는 뒤죽박죽이 되겠지요. 하지만 떠나기 전에 분명히 해 둬야 할 충고들이 있어요. 우선 저 사람....”
다 나이디는 손으로 강인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해요. 그녀를 포기하든,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든 간에. 그렇지 않으면 그 두 가지를 다 잃어야 할 테니까.”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괴로운 표정이 그를 스쳤으나 이내 사라졌다. 다 나이디는 아까보다 다소 거칠어진 음성으로 이번에는 강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도 괴롭군요. 하기야 당신은 그렇게 괴로워야 할 이유가 있었지......하지만 여자의 마음도 그에 못지 않아요. 잠깐만.....”
다 나이디는 강윤의 팔을 끌어당겨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강윤은 기묘한 미소를 띠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강윤을 살며시 밀쳐내고 난 다 나이디는 숨만 가볍게 헐떡일 뿐 몇 분간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뺨을 따라 생겨난 붉은 눈물의 자국들이 자못 애처롭게 보였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서 일어나 민효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은 쌍둥이 자매의 포옹이나 진배없었다. 강윤과 강인은 서로를 마주 쳐다보았다.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다른 이란성 쌍둥이인 그들은 저와 같이 똑같은 모습을 한 서로를 포옹할 기회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민효가 둘이었다면, 그들은 두 민효를 사이좋게 나눠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민효는 하나뿐이고, 그래서 모든 일이 헝클어져 버렸다. 설령 이처럼 또 다른 민효가 하나 더 나타났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민효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공통된 가정법을 현실로 재현한 한 편의 길고 장황한 드라마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현해 보니 그다지 만족스러운 상황도 아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주사위든 다 나이디든 사라져 주는 게 옳은 것이다.
다 나이디는 얼떨결에 자신을 마주 끌어안은 민효에게 말했다.
“너는.......저 주사위가 없이도 누군가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 이제는 그럴 수 없겠지만......하지만 그런 건 없는 편이 더 낫지......고마워. 너는 나를 잘 돌봤어. 너와 헤어지는 것이 가장 슬퍼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나 역시 나는 네게 감사할 거야. 언제까지나......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신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 돼. 그건 너무 무익해......너를 들여다보는 내 마음이 너무 슬펐어. 이해해 줘.....불쌍해........”
민효의 어깨를 안은 나이디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놀란 민효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다 나이디는 맥없이 그 자리에 주르르 쓰러졌다. 놀란 강윤이 다가가 그녀를 안아 일으켰으나 민효가 그를 떠밀어 냈다.
“가만히 놔 둬. 그녀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한 거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는 강인을 포함한 세 사람은 조용히 쓰러진 다 나이디를 내려다보았다. 엎드린 자세로 쓰러진 나이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육안으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나이디의 몸은 분명히,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구경거리는 평생을 살아도 보기 힘들 거라는 냉소섞인 소감을 내뱉으려다 말고 강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쓰러진 다 나이디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말없이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약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 다 나이디의 몸은 작은 어린아이의 몸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 나이디는 민효의 옷에 감싸인 다섯 살짜리 작은 여자아이의 몸으로 변해 있었다. 민효는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는 숨을 쉬지 않았으나 민효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내리치자 작게 기침을 하고는 그제서야 긴 숨을 들이마셨다.